신흥무관학교 교관 활동, 임시정부 외무위원 지내
2대 도백 활동 중 1951년 도청피습사건으로 퇴진

▲ 2대 이광 충북지사는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에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력으로 도백이 됐으나 6.25 당시 피란도정에 이은 도청피습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과 충북인

1948년 8월15일 수립된 대한민국정부는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채 일제가 남겨놓은 조직과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5년 11월23일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환국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뿌리는 친일에 박혀있었다. 중앙에서 지방까지 주요 관직은 경험이 풍부한 일제강점기 관료들의 몫이었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당시 입신양명한 도백들의 열전(列傳) 속에서 빛나는 이름이 있으니 2대 이광 지사다. 이 지사는 올해로 개교 100년을 맞는 신흥무관학교의 교관 출신이자 임시정부 외무부에서 북경주재 외무위원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이광 지사에 대한 국가보훈처 자료를 요약하면 1909년 봄 신민회 간부회의에서 만주지방에 독립운동기지를 확보해 군관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기로 함에 따라 그해 겨울 이시영, 이회영 형제를 비롯해 이동녕, 이상룡 등과 함께 만주로 떠난다. 일종의 선발대였던 셈이다.

이듬해에는 신민회에서 결의했던 대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경학사는 농사짓고 배워서 독립 국민의 자질을 갖추고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자는 의미요, 신흥강습소는 청년군관 양성이 목적이었다. 그는 잠시 신흥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19년에는 3.1운동을 계기로 애국지사들이 상하이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의정원을 설립했는데 이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돼 임시정부의 설립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임시정부에서 그는 외무통이었다.

1921년 12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위원으로 베이징 특파원을 맡았다. 1930년 대한독립당주비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한국지혈(韓國之血)을 순간(旬刊)으로 발행할 때는 기자로 활동했다. 1932년 9월에는 난징(南京)에 집결한 독립투사들과 한국광복진선을 조직했고 1938년에는 창사(長沙)에서 임시정부 호남성 외교원으로 활약했다.

1949년 1월26일 이광 지사 부임에는 신흥무관학교 시절 동지였던 초대 부통령 이시영과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의 인맥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 동지들의 천거로 官 입문

‘도정반세기(1996년·충청리뷰사)’의 저자 이승우 전 충북도 기획관리실장은 “1950년 3월 청주중학 6학년 때 제1회 보통고시에 수석 합격해 당시 이광 지사로부터 합격증을 전수받았다. 6척 장신의 준수한 외모, 근엄한 인품에 압도됐다”고 회고했다. 이 전 실장은 또 “독립지사 출신의 도지사라는 이유만으로 도민들로부터 충분히 존경을 받았던 도백이었다”고 덧붙였다.

이광 지사는 도지사로 재임하는 2년6개월 동안 6.25전쟁의 포화 속에 휩쓸려 두 차례나 부산에서 피란도정을 이끄는 등 사실상 정상적인 도정수행이 불가능했다. 1950년 7월10일 첫 피란을 떠났다가 9.28수복 직후인 10월1일 청주로 돌아온 것이 첫 번째고, 1951년 1.4후퇴의 영향으로 1월7일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보름 만에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피란도정에 대한 생생한 상황은 ‘도정반세기’ 외에도 동아일보 충북판 기자를 거쳐 충청일보의 전신인 국민일보, 충북신보의 주필, 주간을 맡았던 홍원길 전 청주시장의 ‘청곡회고록(1978년·태양출판사)’에 자세히 서술돼 있다. 홍 전 시장은 충북도의회 의원을 지낸 뒤 1956년(초대)과 1960년 2차례에 걸쳐 민선 청주시장을 역임했다.

첫 피란 당시의 충북 임시도청은 부산시청 앞에 있는 부민관으로, 업무는 피란한 도 공무원들에 대한 봉급 지급과 신분증 발급이 전부였다. 도민증 발급은 훗날 괴산군수를 지낸 정화국씨가, 회계업무는 후일 청주시장을 지낸 최태하씨가 처리했다는 것이 도정반세기의 기록이다.

▲ 도백으로서 이광지사의 면모는 ‘도정반세기(1996·충청리뷰사)’와 ‘청곡회고록(1978·태양출판사)’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청곡회고록을 쓴 홍원길(사진)은 동아일보, 국민일보·충북신보(충청일보 전신) 기자 출신으로 1956년 초대 민선 청주시장을 지냈다.

두 차례 피란도정, 도청피습 수난

‘청곡회고록’에는 9.28수복 직후 청주로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부산에서 국민일보 전시판(戰時版)을 발행했던 기록이 나온다. “단독 이광 지사를 찾아갔다. 이광 지사와 회담에서는 신문제작을 위한 자금조달을 해주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김창기와 나는 타블로이드 1면씩을 분담책임지고서 원고를 썼다”는 것. 회고록에는 또 신문을 뿌리면서 영동, 보은을 거쳐 청주로 돌아오는 과정이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로 돌아섰으나 이 지사는 1951년 5월26일 새벽 3시 공비들에 의해 도청이 피습되는 사건을 계기로 두 달 뒤 지사에게 물러나게 된다. 도정반세기, 청곡회고록 모두 당시 도청을 피습한 세력을 ‘공비’로 묘사하고 있으나 150명에 이르는 이들은 인민군 패잔병에 빨치산, 지역의 좌익 등이 연합한 부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정반세기는 이날 사건에 대해 “공비들이 회의실, 후관건물 3동과 경찰 무기고, 정문 앞의 수리조합 건물을 방화·폭파하는 와중에 숙직조들은 용케도 피신할 수 있었다. 그날 새벽 대성동 도지사 관사 보초순경이 피살되고 이광 지사는 북쪽 울타리를 넘어 수동민가로 피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원길 전 시장은 전날 계엄민사부장으로 일하다 이임하게 된 신동우 공군중령과 밤늦게까지 석별주를 마셨다. 홍 전 시장은 회고록에서 “술 취해 깊은 잠에 든 나를 아내가 총소리에 놀라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정신 차려 대청마루에 나와 보니 콩 볶듯 총소리는 요란하고 화광은 충천하고 있었다. (중략) 신동우는 총소리에 놀라 서문교를 넘어 용화사 근처 보리밭 속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이고 후임자 최경만 중령은 비겁하게도 숙소의 방문을 잠그고 자라목 오그라들듯 웅크리고 나오지도 못하였다는 것이 뒷이야기고 보면 전시 하 군기가 확립돼 있었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고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와 함께 촌평까지 곁들였다.

이광 지사는 비록 도청피습사건으로 충북도백의 자리에서 하차했으나 이후 현재의 감사원장 격인 감찰위원회 위원장, 체신부 장관 등을 지내는 등 관운은 기울지 않았다. 1966년 세상을 떠났고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독립志士 출신 知事…친일 지사, 군인 지사
1963년까지 충북지사 면면, 격동의 근현대사 반영

1946년 2월15일 미 군정청은 첫 충북지사로 윤하영 목사를 선임한다. 윤 지사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자리를 보전해 초대 공식 충북지사로 이름을 남겼다. 이후 5.16쿠데타로 현역 군인이 도백의 자리를 꿰차고 앉았던 1963년 12월15일까지 충북지사 12명의 면면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그대로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지사 출신의 이광(2대), 정현모(4대) 지사 등이 있었던 반면 일제강점기 충북도 평의원과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이명구(3대) 지사도 있었다. 정낙훈(5대), 김학응(6대), 정인택(7대), 황종률(8대) 지사는 친일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의 관료출신이다. 황종률 지사는 만주국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만주정부 관료를 역임했다.

9,10대를 연임한 조대연 지사는 부임 당시 72세의 고령이었는데 1908년 구한말 최후의 초급관료를 지낸 뒤 일제 초반 잠시 관료로 머물다가 야인이 됐으나 해방 후 정계활동을 시작해 1950년 민주당 소속으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4.19 바람을 타고 온 조 지사는 초대(통합 10대) 민선지사에 당선되자마자 5.16 군사쿠데타의 광풍에 밀려나고 향토사단(37사)장인 고광도 준장이 11대 지사로 취임한다. 이어 최세인 소장이 36살의 젊은 나이로 12대 지사에 취임했다. 최세인 지사는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군복을 벗고 출마한 1963년 10월 대선에서 당선됨에 따라 ‘민정이양’이라는 명목 아래 1963년 12월16일 원대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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