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군 엄정면 논강리가 고향인 서강숙 할머니(82). 9살 때 정암촌에 왔다. 73년 전 동무들과 불렀던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를 기억하고 있었다. "강숙아 얼른 일어나. 얼른." 아버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그녀를 깨워 짐보따리를 들려줬다. 바가지를 한 움큼 들고 있는 엄마를 보며 옷을 챙겨입고 떠나온 게 고향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해 징그럽게 추웠어. 먹을 것도 없는데 농사지으면 족족히 공출당해 옥식기, 좁쌀, 보리도 먹기 어려웠어." 정암에서 엄마는 연년생으로 딸을 둘 낳았지만 둘 다 세상을 떴다.

그녀의 아버지는 배움이 있는 식자(학자)로 마을이름 '정암'을 작명한 인물이다. 지식이 죄라고, 1970년대 중국 문화혁명 때 잡혀 두드려 맞고 고초를 당한 후유증으로 건넛산에서 자살했다. 가장의 죽음으로 집안의 큰딸인 그녀와 모친의 삶은 더욱 팍팍했다.

"소도 기르고, 담배농사, 엿장수, 콩나물 장수, 안 해본 게 없어." 늙어서 두 다리 아픈 아들 약값 벌기 위해 그녀는 72살에 한국 모래내 시장 화장실에서 5년 일했다. 새벽 5시부터 17시간 일했지만, 가난은 여전하다. 서울로 돈 벌러 간 딸들은 그녀에게 "앞만 보오. 오마니. 뒤는 절대 돌아보지 마오"라며 사정을 한다. 남편이 죽을 때도 "일 좀 그만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옥천이 고향인 신순호 할머니(75)는 머슴을 살았던 아버지 고향이 옥천 연주리인지 석탄리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땅 주고 집 준다는 말에 자식들 호강시키려고 아버지는 만주행을 택했다. 그녀 나이 2살이니 기억날 것도 없다. 정암에서 남동생 세 명을 낳은 아버지는 입에 풀칠이 쉽지 않았는지 유독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래도 정은 많았다. "머슴 살아서 그런가. 남의 집 굴뚝에 연기가 안 나면 아버지는 곡식을 퍼줬어. 배곯을까 봐 걱정을 한 거지." 1945년 광복을 맞았을 때 정암 주민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돈 없는 설움이라고 고향 가는 것도 맘대로 안 됐다.

죽을 때 오래 앓지 않고 죽는 게 소원이라는 그녀는 꿈에라도 부모 얼굴 한 번 보고 싶지만, 한 번을 안 나타나는 게 서운하다. 돈 벌러 간 손자들 때문인지 죽을 때 염(殮)해 주는 손주 옆에 두고 싶은 게 할머니의 마지막 바람이다.

6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언니, 오빠와 정암에 들어온 박정순 할머니(77)는 보은군 탄부면이 고향이다.

썩은 콩깍지를 삶아서 먹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다. "옥식기 대로 지팡이 한다고 하더니 척박하기가 이를 데 없어." 잠결에 들리는 아버지의 한숨과 어머니의 눈물 훔치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는 할머니는 22살에 결혼해 자식 셋 낳았지만 30살에 남편이 죽었다. 혼자 산 세월이 47년이다. 광복이고 뭐고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동네에선 깡이 세다고 소문났다. "다 세상 뜨고 보니 그리운 게 사람이여. 호구가 고향에 있으니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고향 자락 밟는 게 소원이다.

이옥순 할머니(76)는, 4살에 이곳에 왔다.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가 고향인 그녀는 일만 한 부모 대신 큰오빠 등에 업혀 살았다. "가만히 드러누우면 마음이 저려. 나를 고와했던 오빠도 떠오르고." 48살에 기침병으로 사망한 큰오빠가 지금도 부모보다 더 보고 싶다. 젊어서는 가난해서 고생했고, 늙어서는 두만강을 건너온 북한 며느리가 손주 낳고 살다 붙잡혀가 아들, 손주 수발에 허리 펼 날이 없다. 6년 전 끌려간 며느리를 언제 볼지 그리운 마음을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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