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남쪽의 정객 몇 사람이 삼팔선을 넘었다. 김구(金九)를 비롯한 남쪽 대표 중에 노신사 한 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다. 이렇게 홍명희는 삼팔선을 넘었고,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했으며, 조선의 부수상을 역임하고 평양에서 서거했다. 벽초 홍명희의 조선행은 친일잔재 청산을 하지 못하는 남쪽에 대한 비판의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자의적으로 북쪽을 택한, 분명한 월북이다. 월북(越北)은 분단 이후 남쪽 또는 한국에서 북쪽 또는 조선으로 자의적으로 넘어간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보은 출신의 시인 오장환의 경우는 어떨까? 성격이 깔끔했지만 건장하지 못했던 오장환은 해방공간에 병으로 시달렸다. 그는 한국전쟁 전에 병을 치료하러 삼팔선 넘어 북쪽으로 넘어갔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오장환 문학관의 공식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오장환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테러가 자행되면서 몸을 심하게 다치고 치료를 위해 북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오장환처럼 이념적 자의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치료를 위하여 북쪽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던 경우 역시 월북으로 분류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오장환의 월북 전후가 불분명하고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반면 옥천 출신의 시인 정지용은 복잡하지만 납북(拉北)으로 보아야 한다. 정지용에 대해서는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어서 조선에서 활동했다는 학설과 인민군으로 활동하다가 붙들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박창현이라는 가명으로 수감되어 있었다는 학설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설(定說)은 한국전쟁 중 조선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어서 이광수, 계광순 등과 함께 수용되었다가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간단히 말해서 월북이 아니고 납북이다.

이 세 작가의 경우처럼 북쪽으로 간 작가들에 대한 분류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홍명희의 경우처럼 자의적으로 월북한 작가군 둘째, 오장환의 경우처럼 자의적인지 타의적인지 불확실한 상황의 작가군 셋째, 정지용의 경우처럼 타의적으로 끌려 북쪽으로 간 납북 작가군이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 타의적이거나 상황에 따라서 북쪽으로 갔지만 이후 행적이 친조선적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공식적으로는 월북, 불확실, 납북으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고 논리다. 그렇지만 분단체제의 한국정부는 이유를 막론하고 해방공간이나 한국전쟁 이후 북쪽에 있는 작가를 모두 월북작가로 규정하고, 감시와 억압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남쪽에 남아 있는 가족 역시 60여 년간 압박의 설움과 눈물의 사슬을 안고 살아야 했다.

다행하게도 한국정부는 2011년, ‘납북피해자’를 월북과 구분하고 이들의 명예회복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원래 국가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장치(ISA)이므로 반공친미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류 자체까지 거론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납북 인사 중 월북의 자의성도 없고 한국 정부나 한국 국민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면 그런 고통과 사슬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또한 월북이라고 하더라도 작가의 경우에는 정치가나 군인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론은 하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 통일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김승환(충북대교수/충북문화예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