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자 420건 불과…홍보부족 ‧ 월북자 제외 탓

지난 2일 피해가 공식 인정된 납북자들은 대부분 민간인들로 많은 납북된 문인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 당시 납북된 수만여명 중에는 이름 꽤나 날리던 사람들도 다수 있다. 북한이 주요 인사들을 납치한 것은 당시 부족했던 소위 지식인 계층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담화문을 통해 “남한의 지식층을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은 최근까지 납북자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북한은 2006년 9월 노동신문에서 `용납할 수 없는 반공화국 모략 소동'이라는 사설을 통해 ‘우리 공화국에는 애당초 랍북자란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한국전쟁을 전후해 수많은 사람들의 월·납북이 이뤄졌다. 직업도 다양했다. 김명호 강릉대교수가 2009년에 발표한 논문 ‘6.25 전쟁 납북자의 납북동기 분석에 관한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당시 충북에서 납치된 사람은 8277명. 이들의 직업은 경찰, 공무원, 기술자, 교원, 군인, 농업 및 노동자, 변호사, 의사, 학생 등 다양한 직업을 보이고 있다. 분류에는 없지만 문인들에 대한 관심도 높다. 우리지역에서는 홍명희(괴산), ‘오장환(보은), 정지용(옥천), ‘모밀꽃’의 정호승(충주)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월·납북했다.

이들 월·납북시인들은 1988년 7월 해금조치가 있기 전까지 이름조차 거론할 수 없었다. 해금 이후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고 오장환시인은1996년 고향 보은에서 문학제가 개최됐으며 2006년에는 월납북문인 중 처음으로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홍명희는 그의 손자 홍석중이 2004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하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 왼쪽부터 오장환, 정지용, 홍명희

지난 2일 정부의 납북자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발표를 했지만 그 수는 55명에 불과했다. 이는 전국에서 불과 420건이 접수되는 것에 그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표본’이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홍보부족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또한 오장환 시인의 경우 납북피해자임을 신청해 줄 후손도 남아있지 않다.
정호승시인의 아들인 정태준씨 역시 이번 정부가 납북자를 공식인정한 결정에 대해 “알지 못했다”라고 전했다. 정씨는 “아버지가 시를 썼다는 것도 해금 조치 이후인 1992년이 돼서야 알았다.

이후에도 시인 정호승에 대한 연구는 진보적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이뤄졌을 뿐 보수적인 지역문단이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씨는 “연좌제로 주변사람들의 큰 고통을 받았다. 납북관계의 부침이 심한만큼 정부의 납북자 인정을 계기로 월·납북된 시인들의 인식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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