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표 편집국장

둔황을 떠나는 날 한국으로부터 날아온 중국소식을 중국에서 들었다. 나는 여름휴가를 맞아 충북의 시(詩) 창작 모임인 ‘2월시 동인’들과 실크로드 여행 중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잊어 며칠인지 몰랐으나 이제와 따져보니 18일쯤이었던 것 같다. 일행 중 누군가가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별일 없느냐”는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신장성(新疆省)에서 위구르족과 무장경찰이 충돌해 20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보도가 한국에 외신으로 전해졌으니 놀라움이 컸던 모양이다. 우리는 하루 전날 신장의 성도인 우루무치에서 둔황(敦煌)으로 왔으나 중국 언론을 유심히 보지 않았고, 보았다고 해도 중국 TV에 위구르의 봉기가 보도됐을 리도 만무했다.

둔황은 간쑤성(甘肅省)이라 더욱 더 무슨 일이 있었냐 싶었다. 그러나 귀국 하루 전 국제공항이 있는 신장 우루무치로 돌아오는 길은 심상치 않았다. 소총을 든 무장경찰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고 우리가 탄 버스에까지 올라와 승객의 면면을 살폈다. 말이 경찰이지 복식은 군복이어서 위압감이 더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위구르인이어서 우리 버스에서 검색은 없었다. 그러나 차창 밖으로 위구르인들이 탄 승합차를 뒤지는 경찰들의 모습이 목격됐다. 창밖 풍경을 사진기에 담는데 손끝이 적잖이 떨렸다. 우루무치 바자르(市場)의 파출소에도 무장한 경찰들이 대기 중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확인하니 폭동이 일어난 곳은 성도인 우루무치가 아니라 신장 남부의 허텐(和田)이었다. 어찌 됐든 신장 전역에 계엄령이 발효됐던 것은 맞다.

사실 이 같은 풍경은 낯설지 않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청주초입인 강서에 검문소가 있어서 경찰이 버스를 검문했다. 80년대 학번이다 보니 죄 지은 게 없어도 경찰 앞에서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무리지어 다니는 경찰들이 ‘신분증을 보자’면 하릴 없이 지갑을 열어야했고 시위가 벌어지는 현장 부근을 지날 때는 가방을 열어 보이기도 했다.

시위대의 ‘서울역 회군’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1980년 ‘서울의 봄’ 때에도 계엄령이 내려졌던 걸로 기억되나 나는 중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라 살 떨리는 계엄의 추억은 없다.

정말 기가 죽었던 것은 2005년 3월 금강산에서였다. 비록 이명박 정부 들어 중단됐지만 충청리뷰는 2004년부터 금강산에서 마라톤 행사를 개최했었다. 분단철책을 넘어 북녘으로 넘어서자마자 총을 든 인민군이 버스에 올라왔다. 총 끝보다 무서운 것은 그의 눈매였다. 그리워했던 동포였지만 나는 눈을 내리 깔 수밖에 없었다.

2008년까지 다섯 번 금강산에 갔다. 갈 때마다 긴장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버스검문은 이듬해 사라졌고 출입경사무소에서는 예전처럼 소지품을 일일이 뒤지지 않았다. 외국을 드나들 때의 출입국 절차보다도 북한을 오고가는 일이 간소하고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됐을 쯤 박왕자씨 총격사건이 터졌고 거짓말처럼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 2008년 7월의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1년여 남은 현 시점에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남북 실무자 회담이 29일 열린다고 한다. 다시 금강산에서 마라톤을 개최할 날이 오리라는 기대에 가슴이 느껍다. 관광이 재개됐을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조우하게 될 지 궁금하다. 다시 총을 든 인민군이 버스 위에 올라와 눈을 부라릴 것인가? 부디 3년 전 헤어질 때 그 모습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바란다. 더불어 투르크의 땅(투르키스탄)으로 독립을 원하는 위구르인들에게도 평화를!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