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높아···하늘로 솟구치려는 상승감 표현

▲ 역사적 의미도 있고 경치도 아름다운 중앙탑. 원 명칭은 중원 탑평리7층석탑이다.

권상준 교수가 간다 (3) 중앙탑공원

중앙탑공원은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서 주제공원(역사·문화·수변·묘지·체육 공원 등)중 역사공원의 성격을 지닌 곳이다. 도내에서는 오래되고 한민족사적으로 의미심장한 기념물경관중 비중이 큰 자원이다. 한민족의 부침과 대륙진출의 한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상징경관을 함의하고 있다. 그 곳은 달천과 남한강의 본류가 합수하는 길지에 있다. 경상도 빗물이 흘러들어오는 곳이다. 달천의 머리부로 경상도 상주의 하천이 화북면 중벌리에서 발원하여 괴산호를 불리고, 강원도를 거친 남한강을 만나 충청도와 경기도에서 키워 북한강과 만나 서울로 흘러가는 뜻이 함유된 곳이다.

충주는 삼국시대부터 국원(國原), 중원(中原)이라 불렸다. 그것은 국토의 중앙이며 중심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충주의 기능은 중추성에 기반을 둔 셈이다. 충주의 장소성은 중앙탑(명칭은 중원 탑평리7층석탑)을 세운 연유에서 비롯된다. 충주가 중심 고을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탑이다. 전설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의 경우 영토 위치로 보아 탑의 위치가 중앙이 되는 지점에 있기 때문에 전해진 것이라 보인다. 당시 선조들은 충주가 국토의 지리적 중심과 인구와 자원의 중점의 백타 총화의 기준이 되는 것을 알았다.

국보 제6호(1962.12.20.지정)인 중원 탑평리7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9세기 중엽)때 세워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흔히 중앙탑이라고 불린다. 다만 일제강점기인 1916년 작성된 탑의 수리에 관한 문서를 보면 모두 ‘중앙탑’이란 명칭을 쓰고 있고 충주지역의 주민들은 공식 명칭을 거의 쓰지 않고 중앙탑으로 애칭하고 있다. 이 문서 말미에 “구비로 전함에 의하면 중앙탑의 명칭은 조선의 중앙지라고 전설하였다는데 유함이라”고 하여 건탑 유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공원안에서 중원문화 감상까지
신라 원성왕대(785~798)에 세워졌다는 전설이 있는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중 가장 키가 큰 높이 14.5m의 유일한 7층 석탑이다. 2층 기단 일반형 석탑으로 탑신에 비해 기단부의 너비가 넓다. 기단은 각부를 거형석으로 조립하였고 상하층 기단이 모두 면석에 4개의 탱주로 세워 놓았다. 탑신부도 거형석으로 구성하였고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며 중첩되었다.

그리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이 모두 5단으로 옥개석 각층마다 낙수 홈이 파여져 있다. 상륜부는 이중 노반으로 포개어 그 위에 복발 앙화만이 남아있다. 탑 조형술과 세부상세기법의 단순성에 기반을 두고 있어 약식과 섬약이 표출된다. 탑 형상은 높이와 너비의 비례가 상대적으로 수직상향성이 두드러져 웅대함보다는 하늘로 솟구치려는 상승감을 강조하고 있다.

탑이 하늘을 향한 초점경관이며 동으로 백두대간 산악의 점진적 중첩경관과 구릉지와 시가지경관, 남으로 검단산의 능선과 팔송산의 차경, 서로 상진대와 황금산의 산림경관, 북으로 장미산의 산림경관과 산성의 조망경관이 배경을 이루고 있어 산수의 위요경관이 조화롭다.


공원내 충주박물관과 고구려천문과학관이 있어 중원문화를 감상하는 동기를 부여해주며 주변의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와 함께 삼국시대의 각축장이었음을 일깨우는 역사적 전승공간이다. 역사가 흐르는 물가로 점근하여 사유하면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향하는 통일 민족의 웅지를 키워야 할 성지적 요소를 지닌 장소성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근경의 잔디밭과 푸른 초원과 합수를 엮어내는 사이로 중경의 시가지를 안고 점층적 산악경관이 켜를 두고 위요되는 원경은 경관적 소재를 듬뿍 담은 곳이다.

탑 주변에는 ‘문화재와 호반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조각 작품 26점을 전시한 충북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과 시민위락시설이 있고 호반 같은 강물에 조정경기장시설과 술박물관이 연담 되어 누구나 쉽게 접근가능하다. 장래 강 너머 구릉지와 주변 외연을 확대하여 국가기념공원화해야 할 성역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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