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 지은 분암···박상일 실장 서재로 탈바꿈

수천암은 배산임수형이다. 마루에 앉으면 미호천 지류가 보이고, 뒷쪽으로는 산이 있다.

어느 날 박상일 청주대박물관 학예연구실장(54)으로부터 한 장의 명함을 받았다. ‘역사학박사 박상일’. 그런데 여느 명함과 달랐다. 한 눈에 봐도 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듯한 기와집과 빙 둘러쳐진 담, 그리고 대문까지 한 폭의 그림같은 집이 배경으로 깔려 있는 것 아닌가. 오랜 역사와 거기에 맞는 얘깃거리가 있는 집을 찾고 있던 중 눈에 확 들어왔다. 박 실장의 집은 그렇게 해서 가게 됐다.

역시 유서깊은 집으로 ‘水泉庵’이라는 이름까지 가지고 있었다. 수천암은 집 양쪽에 샘이 있다는 의미에서 따온 것이다. 청원군 옥산면 신촌길, 배산임수 지형으로 마루에 앉으니 미호천 지류가 보이고 뒷산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눈에 보이는 자연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이 집은 박 실장의 20대조 할아버지인 박훈 선생(호 강수)의 묘를 모시기 위해 지은 분암(墳庵)이다.

그는 “조선전기 성리학자였던 강수 할아버지께서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 측근으로 활약했으나 훈구세력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다 어머니 고향인 이 곳으로 낙향하셨다. 돌아가신 뒤에는 이 곳에 묘를 썼다. 강수 할아버지는 유림쪽에서 중심적인 인물로 기묘명현, 낭성팔현 등으로 불리셨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선비, 청주의 어진선비 8명이라는 뜻이다. 청주 용암동 이정골에 있는 신항서원은 이 분을 모시기 위해 건립된 곳”이라고 말했다.

‘뼈대있는 집안’ 자손이라서 일까. 그의 전공은 역사학이다. 현재 가족들은 오창 아파트에 살고 있고, 이 곳은 그의 서재다. 얼핏보기에 이런 기와집을 서재로 사용하다니, 대단한 부자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집은 밀양박씨 종중 소유이나 아무도 살지 않아 허물어져 가는 곳을 박 실장이 나서 보수하고 살린 것. 그가 아니었으면 자칫 중요한 문화재 한 채가 사라질 뻔했다.

청원군 옥산면에 있는 수천암 전경

그는 “옛날에는 산지기가 이 집을 관리했다. 이후 산지기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아들이 살다 집을 나가 10년 이상 비어있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해 종친회 총회에서 철거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 소식을 듣고 내가 종친회장을 찾아가 문화재를 없애버리면 안된다고 사정하면서 살아났다. 그런 뒤 97년 종친회에서 거금을 들여 깨끗하게 보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장 들어와 살 사람이 없어 이 집은 다시 10년 동안 방치된다. 그러는 동안 골동품상들이 문짝을 떼어가고, 지붕은 반파돼 집이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박 실장은 이런 모습을 보고 책임감을 느껴 2009년 본격적인 관리에 들어갔다고 했다. 담장과 대문을 신축하고 주차장을 포장했으며 집안 구석구석을 손 본 덕분에 집은 현재 깨끗하다. 요즘 그는 자주 들러 풀을 뽑고 청소를 한다. 호젓하게 앉아 망중한을 즐길새 없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풀 뽑는 게 일이라고 했다.

수천암 현판은 470여년된 이 집의 역사와 함께 한다.
2009년 충북도 문화재로 지정
이 집은 지난 2009년 충북도 문화재로 지정됐다. 집 입구에는 문화재를 알리는 현판이 서있다.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평면은 북측에서부터 1칸반 크기의 부엌과 2칸의 방, 2칸의 대청, 1칸의 방으로 구성돼있고 방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다고 쓰여 있다. 집이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 때 것으로 박 실장은 추정하고 있다. 그는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간의 과정을 쓴 '수천암 문화재지정기'라는 기문을 써서 벽에 걸었다. 박 실장이 짓고 서예가 박수훈 씨가 서각을 했다. 기문에는 “世傳에 의하면 중종 35년 1540년에 강수 선생이 이곳에 영면하시면서 묘소 수호를 위해 작은 암자를 세우고 당내의 선승인 宣政祖師에게 경영하게 하면서 수천암이라 했다고 전해진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집에는 또 하나의 기문이 걸려 있다. 1914년에 이 집을 개축했다는 '수천암 중수기'라는 것이다.

그는 “이 집은 내게 큰 의미가 있다.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족보에 '모월 모일 수천암으로 모이라'는 통문을 보낸 사실이 여러 번 나온다. 여기 모여 중요한 회의를 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수천암’이라는 현판과 마루 5개의 기둥에 써붙인 柱聯을 보더라도 이 집의 오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뒷뜰에는 그런 역사를 대변해주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무성한 잎을 자랑하며 서 있다.

일자형 집은 방 3칸과 부엌, 마루가 전부다. 소박하다. 화장실은 마당가에 따로 있다. 여름에는 시원해서 좋으나 겨울에는 너무 추워 전기판넬을 깔아야 할 정도라고 한다. 그는 방과 부엌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방에는 책장과 책상, TV 한 대가 놓여있고 부엌에는 무쇠솥 2개와 장작이 쌓여 있었다. 무쇠솥은 옛날 시골에서 보던 그 모습이다. 순간 어릴 때 생각이 났다. 오래오래 그 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홍강희 기자

박상일 실장, 31년째 청주대박물관 재직
도 문화재위원·문화유산연구회장 등 활동 활발

박상일 학예연구실장
청주대 역사학박사인 박상일 실장은 이 분야에서 꽤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충북도 문화재위원·(사)충북도 문화유산연구회장·충북도 향토사연구소 부소장·청주서원향토문화연구회장·청주문화원 부원장·백제유물전시관장 등. 그외 위원 명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상당히 많다.

“종가집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역사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 때는 발굴조사에 미쳐 돌아다녔다. 잊혀졌던 것을 찾아내는 묘미가 상당했다. 그 때 미륵리사지와 충주댐 수몰지역 문화재조사에 참여했다. 2학년 마치고 군대가려고 했으나 보고서 써야 한다고 교수님이 잡는 바람에 못 갔고, 3학년 마친 뒤에는 발굴조사에 참여하느라 못 갔다.”

그러던 중 4학년 때 졸업논문을 열심히 쓴 덕에 청주대 우암학술논문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이 논문은 전국대학생논문발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돼 큰 거금을 상금으로 받고, 청주대박물관 연구원으로 채용되며 대학원에 진학했다. 현재 박물관에 31년째 재직중이다. 대학 재학 때부터 도내 문화재 발굴조사에 많이 참여한 덕에 그는 문화재 사정에 밝다. 머릿속에 ‘그림’이 다 그려져 있어 오늘도 무엇을 어떻게 복원하고 보존해야 하는지 의견을 내고 연구하는 일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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