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공(子貢)이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마을 사람이 다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자공이 거듭 질문했다. “마을 사람이 다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다시 대답했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 아니다. 마을의 선한 사람이 그를 좋아하고, 마을의 선하지 않은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논어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결국 타협해야하지만 이 같은 기회주의가 최상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한 탁월한 해석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수감돼 20년 간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90·햇빛출판사)’에 명쾌하게 실려 있다. 신 교수는 주자(朱子)의 주석을 예로 든다.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필시 구합(苟合)이 있으며, 반대로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마을의 선한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실(實)이 없다 하였다”고.

신 교수는 이에서 얻는 교훈에 대해 “논어의 이 문답(dialogue)이 우리에게 유별난 의미를 갖는 까닭은 타협과 기회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당파성(黨派性· Parteilichkeit)에 대한 조명과 지지”라고 역설한다.

욕을 먹더라도 ‘색깔을 지켜라’

신 교수는 또 “불편부당(不偏不黨)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델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偏黨)임을 쉽게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똑같이 신문에 대해 묻는다. 답은 신문의 객관성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반론을 보장하는 등 형식적 객관성은 최대한 허용해야하는 반면, 내용까지도 객관적인 신문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마을사람의 선악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더라도 좋아하는 신문에 따라 성향이 갈리는 것은 분명하다. 솔직히 중앙지의 경우 조선·중앙·동아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겨레·경향을 싫어하기 마련이다.

지역 얘기를 해보자. 지역신문에 뭐 그런 성향이 있을까 싶겠지만 충북지역의 언론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쪽에 경도돼 있다. 한 예로 도지사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기관장 등의 선임에 있어 해당 인사의 이념적 성향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이 지사 스스로도 온건한 탓에 이제까지 급진적인 인사를 중용한 바도 없다. 그러나 보수인사가 아니면 무조건 코드인사 운운하는 보도가 잇따른다. “잘됐다. 욕을 먹더라도 색깔을 지키라”는 게 충청리뷰의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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