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충북의 독립운동 치열' 강조

박걸순 충북대 교수

충북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 대해 별로 자부심이 없다. 인구도 적고, 땅 덩어리도 작고, 도세도 약하다. 스스로 폄하해서 ‘멍청도’라는 말도 쓴다. 실제 역대 정권에서 충북은 이래저래 차별을 받아 왔다. 호남의 차별과는 성격이 구별되는 ‘또 다른’ 차별이다. 그러나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의 ‘은근한 독립정신’이라는 강의를 들으면서 ‘역시 충북사람들이 한 번 한다면 끈질기게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신채호·홍범식·홍명희·손병희 등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와 시대의 양심을 길러낸 충북에 대해 자긍심이 느껴졌다.

지난 25일 있었던 ‘2011 청주인문학교실’에서 박 교수는 충북의 기질을 은근과 끈기라고 정의했다. “충북인의 독립정신은 은근과 끈기다. 속내는 드러내지 않지만, 끝까지 한다. 은근한 독립정신이라는 말이 맞다. 충북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9일 전국에서 가장 늦게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이미 전국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4월 19일까지 한 달 동안 도내 전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다. 충북은 전국 평균보다 훨씬 과격했고 폭력적이었다. 시위양상이 격렬했기 때문에 평안·경기지역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어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권동진·신석구·신홍식·권병직 등 다수가 충북출신 이라는 점도 주목된다고 말했다. 이들 대표들은 후에 법정에서도 당당한 독립논리를 펴며 투쟁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충북인은 누구보다 앞장서 일제에 항거했다. 행동은 빠르지 않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목표달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다.

충청의병, 전국의병 주도
또 박 교수는 충청의병이 전국의 의병전쟁을 활발하게 주도했다고 강조했다. 투쟁의 치열성과 지속성, 성과면에서 볼 때 한말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가 매우 컸다는 것이다. 1894~1896년의 전기 의병 때 제천과 홍성은 전국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전성기 때는 의병수가 무려 1만명을 헤아릴 정도였다고 한다. 중기의병 때는 을사오조약의 늑결과 통감통치에 대항하는 구국운동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는 것. 영국 런던의 '데일리 메일' 특파원이었던 맥켄지가 1906년 제천 일원을 답사하던 중 충주-제천간 도로변의 촌락과 제천시가지가 방화돼 파괴된 사진을 남겨 그 참상을 알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후기의병 대목에 이르자 박 교수는 한봉수 의병장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덧붙였다. “한 의병장은 의병투쟁에 나섰다가 3·1운동까지 주도하는 독립운동의 맥락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진위대 출신이 아니고 농부였다. 돈이 들어 있는 일본 군인의 우편 행낭을 탈취해 주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래서 민중적 기반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홍범식·홍명희·한봉수를 아는가
다만 한 의병장은 1910년 생명보전과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일본경찰에 자수한 사실이 있으나 그로부터 9년 뒤에 청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해 다시 옥고를 치르는 등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을 했다고 밝혔다. 모 방송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정부로부터 받은 독립장을 환수하고 독립운동가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렇지 않다고 박 교수는 잘라 말했다. 한 의병장의 손자인 한민구 합참의장이 참모총장 1순위에 오르자 누군가 방송사에 이를 제보해 침소봉대했다는 것이다. 실제 한 의병장은 벽초 홍명희와 함께 손병희로부터 고향에 가서 3·1만세운동을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실행한다. 그는 청주에서, 벽초는 괴산에서 운동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청주 상당공원에는 한 의병장 동상이, 중앙공원에는 송공비를 세웠다.

한편 2010년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훈·포장을 받은 사람은 1만1399명에 달한다. 이 중 충북출신 유공자는 383명으로 알려졌다. 박 교수는 이 사람들 중 홍범식-홍명희-홍기문으로 이어지는 홍씨 가문의 절절한 역사들을 풀어놓았다.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재직하던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가 망했다며 당일 자결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자결했으나 홍범식은 그 중 최고위직 이었고, 시간적으로 가장 빨리 자결을 선택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홍명희와 홍기문은 물론이고, 김지섭이라는 금산군 서기는 충격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한 후 의열단에 가입했다. 모두 홍범식의 영향이었다.”

홍명희는 최고의 소설 '임꺽정'을 썼고, 아들 홍기문은 남한보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한 북한 최고의 학자다. 두 父子는 신간회를 만드는데 앞장선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간회는 1927년 설립됐는데 충북지역에서는 신채호(청주) 권동진(괴산) 홍명희(괴산) 홍성희(괴산) 등이 활발하게 참여한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다. 특히 괴산군은 가장 먼저 신간회 지회를 설립했고 괴산청년회 집행위원회가 주도했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

다만 홍 씨 가문에서 문제가 있다면 홍범식의 부친인 홍승목이다. 그는 친일파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당시 이리저리 재산을 모은 그는 사후 14억원에 달하는 재산 환수조치를 당한다. 박 교수는 이 금액이 실제로는 50억원에 달한다고 말해 그가 얼마나 치부를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박 교수는 재미있는 표현을 했다. “안중근과 그 아들은 虎父犬子, 즉 호랑이 같은 아버지와 개같은 아들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들은 그 반대다. 호랑이 같은 아들과 개같은 아버지라고 할까.”

독립운동사 연구하는 박걸순 교수는 누구?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역임···‘한국근대사학사연구’ 등 저서 다수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의 전공은 史學史이다. 박은식·신채호·홍명희 연구 전문가로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충북대에서 학사·석사,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립기념관 학예실장과 교육홍보부장을 거쳤고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수석연구원을 역임했다.

박 교수는 독립기념관이 10권 분량의 신채호전집을 발간할 때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그간 ‘한용운의 생애와 독립투쟁’ ‘이종일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근대사학사연구’ ‘괴산지방의 항일운동사’ ‘식민지 시기의 역사학과 역사인식’ ‘시대의 선각자 혁신유림 류인식’ 등 많은 책을 펴냈다. 충북의 독립운동사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박 교수는 이 날 다소 지루하고 딱딱할 것 같은 화제를 재미있게 강의해 수강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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