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 보리출판사 대표 “10년내 젊은이의 50%는 농촌으로 가야” 주장

윤구병 대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사회는 결국 죽음의 사회다. 도시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생산공동체가 없다. 도시 한 복판에 논이 있나. 밭이 있나. 푸성귀나 나물을 기를 수 있는 텃밭이 있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생산공동체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가져와야 한다.그러나 그 대가로 주는 것은 없다. 모든 유기체들의 상호관계는 서로 주고 받는 것인데 도시사회에서는 끊겨버린다. 도시는 일방적으로 약탈하고 착취할 뿐이다.”

윤구병 보리출판사 대표의 말이다. 그는 꾸미지 않고 질박하게 말한다. 시골사람 답다. 그가 지난 18일 ‘2011 청주인문학교실’에서 강의한 주제는 ‘다함께 사는 길’이었다. 쌀, 문명, 그리고 생명에 관한 얘기였다.

윤 대표는 앞으로 10년내 젊은이의 50%는 농촌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농업은 가장 뒤진 산업이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급속도로 노령화하는데다 대접도 밑바닥이라고 가슴아파했다. 인류의 생명창고가 거덜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이 25% 안팎이고, 잡곡 자급률은 5%를 밑돌며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 전체의 80~90%가 도시에서 사는 구조를 지적했다.

“농업을 되살리는 길은 곧 인류의 생명창고를 지키고 그 창고를 다시 채우는 길이다. 생명창고가 바닥을 보이면 무슨 문화가, 문명이 발 붙일 수 있겠는가.” 맞는 말이다. 생명창고가 비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윤 대표는 또 그의 저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라는 책에서 ”윤봉길 의사는 ‘농민독본’에서 ‘농민은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2, 3차 산업이 아무리 발달해도 1차 산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고 역설했다. 인류의 생활, 생존이 곧 사람 살림인데 이것이 농민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농민에 대해, 농업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1차 산업은 2차나 3차 산업처럼 그저 하나의 산업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더욱이 ‘뇌’를 쓰는 화이트칼라가 더 많은 일을 한다고 여기기까지 했다.

그는 이런 마음을 꿰뚫듯 “더 잘사는 것은 중요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사는 것이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물질과학의 성과에 현혹되고 그 성과가 제공하는 편익에 길들여져 인류전체가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 가치관의 문명사적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요즘 바늘이 컴퓨터보다 위대하다고 외친다. 컴퓨터는 석 달, 여섯 달 주기로 업그레이드 해야 쓸 수 있는데 바늘은 수천년이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인 이유는 컴퓨터는 불완전 기술, 바늘은 완전한 기술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날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윤 대표가 사는 동네의 풍천아지매가 했다는 말이다. 이 아지매는 까막눈인데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보다 훨씬 명쾌하다고.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게 참말이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게 거짓말이다. 그리고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게 좋은 것이고,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는 게 나쁜 것이다.” 예를 들어 노태우에게 받은 대선자금이 있으면 있다고 하는 것이 참말이고, 있는데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부정·부패·독재는 없을(없어야) 것이고, 정의·청렴·자유·평등은 있을(있어야)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어떤가.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은 있다.

'몸으로 철학하는' 윤구병 대표는 누구?
변산공동체·보리출판사·문턱없는 밥집 등 운영
가난한 사람 위한 식당 열고 자신의 것 다 내줘

변산농부 윤구병(68) 대표는 강연하러 전국을 다닌다. 그가 가족 얘기를 할 때마다 청중들이 웃는 대목이 있다. “어머니가 아들 아홉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큰 아들 이름을 일병, 둘째를 이병, 셋째를 삼병이라고 지었다. 그래서 내가 막내인 구병이 됐다. 동생이 있었다면 이름을 어떻게 지었을지 무척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6·25전쟁 때 일병이부터 육병이 형까지 잃었다는 슬픈 얘기도 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나머지 아들들이 목숨을 보전하고 살려면 공부를 시키지 않고 시골에서 농사짓게 해야 한다며 서울로 이주했다 다시 귀향했다고 한다.

하지만 윤 대표는 공부를 많이 했다. 서울대 철학과와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이후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95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군 변산으로 내려간다. 그러면서 몇 몇 제자와 후배들이 모여들었고 변산공동체가 탄생했다. 20가구 50여명의 식구들이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대안학교인 변산공동체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는 화학비료·농약·제초제·비닐·퇴비를 쓰지 않는 5無농법을 고수하고 있다.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젓갈·효소·술 같은 것을 만들어 자급자족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저 길 걷는 사람이 되자. 어디에 머물지도 말고 무엇이 되지도 말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신차리고 보면 늘 어디엔가 편히 자리잡고 있더라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교수직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군사독재시절, 돌려가면서 읽었던 월간 ‘뿌리깊은나무’ 초대 편집장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지금은 어린이책 출판사인 보리출판사 대표로 있다. 이 곳에서 내는 책들의 주제는 자연과 생명, 우리문화다. ‘어린이마을’ ‘달팽이 과학동화’ ‘겨레아동문학선집’ ‘심심해서 그랬어’ ‘우리 순이 어디가니’ 등으로 창작그림책 시대를 열었다. 이 책에 나오는 세밀화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교한지 누구나 감탄할 정도다.

그는 또 서울 마포구 자신의 건물에서 ‘문턱없는 밥집’과 ‘기분좋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보리출판사와 변산공동체가 운영하는 이 식당에서는 점심 값으로 1000원 이상만 내면 친환경농산물로 차린 밥을 먹을 수 있다. 가진 만큼 돈을 내고 가는 특별한 식당이다. 윤 씨는 그동안 ‘조그마한 내 꿈 하나’ ‘실험학교 이야기’ ‘잡초는 없다’ ‘있음과 없음’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등 다수의 책을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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