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보호법, 기업에 채용·해고 정당성 부여
개념 모호한 시간제·파견, 저임금·무권리의 정글

비정규직 현장보고서/ 법과 정의의 사각지대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전태일, 그가 떠나간 41년 전에 비해 노동자 권익은 분명 향상됐다. 그러나 저임금·무권리에 신음하는 비정규직이 공인되면서 노동시장이 교란되고 차별화가 심화되고 있다. 사진은 2005년 서울 청계천에 조성한 전태일 동상.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시장에서 나이 어린 피복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한 점 불꽃으로 산화해간 전태일의 유서 가운데 마지막 부분이다. 그의 죽음은 순간적인 울분에 따른 선택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중퇴의 학력으로 상경해 17세 때 평화시장 봉제업체에 재단사로 취업한 전태일은 나이 어린 소녀들이 허리도 펼 수 없고 먼지가 가득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면서 박봉을 받는 것에 의분을 느껴 이를 개선하기 위한 공식적인 노력을 다한다.

“근로기준법이라도 지킨다면….” 이는 그가 입버릇처럼 되뇌던 말이었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한자가 많아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지자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하고 바랐다는 내용도 그의 평전(1983·돌베개)에 나온다.

그는 ‘바보회’를 만들었고 노동환경 조사결과를 토대로 노동청과 서울시에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지만 번번이 묵살 당했다.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보냈는데 ‘봉제공은 평균 18세이며 하루 15시간, 시다공은 평균 15세에 하루 16시간을 일한다’고 적었다. 소녀들이 안질, 신경통, 위장병, 폐결핵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며 근로환경을 개선해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했다. 그가 요구한 것은 근무시간을 10~12시간으로 줄이고 월 4회 휴무를 보장하며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실시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41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당당히 G20의 멤버가 됐고 ‘있는 법이라도 지켜 달라’며 몸을 불살랐던 그때에 비해 노동환경이 개선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노동시장이 더욱 정교해져 노동자의 권리를 교란시키는 법 자체가 문제다. 정규직 노동자와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법의 사각지대에서 ‘지켜 달라’고 호소할 근거조차 모호하다. 더욱 모호한 것은 어디까지가 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인지를 정확히 가리는 것이다.

파견·용역·지입 등 노동시장 교란

참여정부시절 노사정위원회가 정리한 ‘비정규직의 개념’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고용형태에 의해 정의되는 것으로 ①한시적 근로자 또는 기간제 근로자 ②단시간 근로자 ③파견·용역·호출 등의 형태로 근무하는 근로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부연설명은 더 헷갈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시간제 근로자에 대해서는 ‘근로시간이 짧은 파트타임 근로자’라고 너무나 당연한 설명만 달아놓았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에 관여하고 있는 이성일 충북지역노동조합 위원장 직무대행은 “파견 노동자의 경우 근무형태는 분명히 비정규직이지만 하청업체에서는 정규직 노동자이다 보니 원청과 하청 모두로부터 불합리한 대우를 받기 일쑤다. 중장비 등을 가지고 공사현장에 참여하는 지입 노동자는 건설현장에서는 재하청을 받아서 노동자처럼 일하지만 실상은 업주이기도 해서 노임을 떼어도 법적으로 하소연할 곳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발표한 비정규직 전국통계는 2009년 3월 기준 33.4%다. 그러나 민간부문은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공공기관의 비정규직은 사실상 신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이 70% 선이고, 용역이 약 20%, 나머지는 시간제, 파견제 등이다. 충청리뷰가 지난해 9월 외교통상부 특채논란과 관련해 사실상 공개채용절차 없이 선발하는 충북도와 청주시의 무기계약직(비정규직) 규모를 조사한 결과 충북도는 7.7%, 청주시는 23%가 이에 해당됐다.

이처럼 저임금, 무권리에 신음하는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며 나온 것이 통칭 비정규직 보호법인데 ‘2년 이상 근무할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해야한다’는 것이 그 골자다. 2007년 7월1일 300인 이상의 사업장부터 시작해 2009년 7월1일 5인 이상 사업장으로 시행범위가 확대됐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참혹하다. 업체들이 이 조항을 피해가기 위해 2년까지 계약을 유지하지 않는 사례가 속출하면서 신분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들이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부당해고 속출, 구제사례 드물어

조광복 청주노동인권센터 노무사는 “법의 시행으로 기업들에게는 오히려 ‘비정규직을 고용해도 되는구나’라는 각인효과를 주게 됐다”며 “여기에다 법을 악용해 고용이 단절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조 노무사는 또 “기업들이 정규직화를 막기 위해서 부당해고를 일삼고 있지만 구제되는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한 해고자들의 노무상담은 기업의 회계연도 개념 때문에 대개 연초에 집중된다. 조 노무사는 “올 초 사회복지관에 근무하는 20대 후반의 여성이 센터를 찾아왔다. 업무능력을 인정받았고 재계약을 사실상 약속받은 상황이었는데 특정 상급자와 갈등이 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다”라고 예를 들었다.

구제사례는 사실상 법원이 손을 들어줄 때가 전부인데, 법도 대부분 노동자의 편을 들지 않는다. 조 노무사는 “법원이 노동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재계약 절차가 사실상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되거나 아니면 아예 이를 정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할 때에 한정돼 있다.

다만 최근 ‘계속고용에 대한 기대감이 충분히 형성돼 있다’며 부당해고라는 판례를 내놓은 것은 아주 드문 예지만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조 노무사는 “내 상담사례로는 지난해 제천의 청소환경미화원이 해고됐는데 ‘재계약을 한다’는 뉘앙스의 문구가 있어서 지방노동위원회에서 구제됐다”고 덧붙였다.

참, 전태일 열사가 살아있다면 64살, 그는 꼿꼿한 허리로 아직도 덩이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삶을 먼저 읽어야한다”고 말했다. 전태일 그는 교란된 이 노동의 현실에 어떻게 저항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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