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을 만나다(6)
권희돈/ 청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거지는 가진 것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이 많은 사람이다. 집도 절도 없고 가족도 없으면서, 일은 하지 않고 취업할 의사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로 보면 거지는 분해된 대중이며, 모든 계급의 폐품에 해당된다. 그런 거지를 두고 마선생(맑스)은 부랑자, 전과자, 소매치기, 창녀, 넝마주이 등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의 최하층인 룸펜프롤레타리아트라 명명하였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고 똑똑한 거지들이 등장하면서 마선생의 견해가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지도 산업이 될 수 있으며, 구걸하는 일이 산업이 되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거지에게 있어서의 스토리텔링이란 곧 동정심에 감성을 입혀서 불특정다수의 소비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어떤 눈먼 거지는 피켓에 다음과 같은 카피를 써놓고 소비자를 기다린다.

“봄이 왔지만 나는 꽃을 볼 수 없어요.”

봄이 왔어도 꽃을 볼 수 없다. 이는 단지 눈이 멀었다는 정보를 머리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꽃을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가슴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소비자의 가슴에 파장을 일으킨다.

비록 자본금 한 푼 안들인 동정심을 파는 일이기는 하지만, 봄의 혼령인 꽃을 볼 수 없다는 감성적인 카피에 행인들은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만약에 그 거지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안 보여요,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제발 불쌍한 눈먼 거지 한 푼만 도와주십시오’ 라고 써 놓았더라면 대부분의 행인들은 불쌍하기는 하지만 너무도 자주 보아왔던 장면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게 될 것이다.

고려대 앞의 지하도에서 구걸하는 거지의 마케팅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는 자기가 앉아 있는 곳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입간판 하나를 설치해 놓는다.

“100미터 앞에 거지가 있습니다. 100원만 받습니다. 돈을 꺼낼 준비를 하십시오.”

▲ 눈 먼 거지가 “봄이 왔어도 꽃을 볼 수 없다”며 깡통을 들이댄다면 우린 그 슬픔에 전염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각설이 타령도 일종의 스토리텔링이다. 사진은 연극 품바의 한 장면.
이 광고를 보는 사람은 우선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위치를 알려준다는 친절함과 100원만 받는다는 정가제 구걸발상이 재미있고 멋지지 아니한가.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동정심의 가치가 100원이라는데 그냥 지나치면, 자신이 100원어치의 동정심도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1000원을 내면 900원은 거슬러주어 정말 100원만 딱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원만이 아저씨’라는 닉네임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는 창업의 신념을 견고하게 갖고 있는 아주 특별한 그리고 아주 소중한 거지를 본 셈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거지는 삶의 균형을 완전히 잃은 사람이다. 가정의 균형이 완벽하게 무너졌고, 사회적 신분도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인생의 저점을 찍은 사람이다. 그러나 위의 두 거지의 행위를 보면서 우리는 미구에 그들이 기울어진 가정의 균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느낌을 받는다. 동정심에 감성을 입힌다든가 소비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행위는 거지이면서 거지 근성을 없애버리고 자신의 일에 독창적이고 창조적으로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거지도 스토리텔링을 하는데 우리도 우리 미래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서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거지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도 가진 것이 많다. 많이 배워 일자리를 얻었고, 사회적 위치를 획득하였으며, 적금통장이 있고, 이슬을 피할 집이 있고, 휴일엔 자동차로 씽씽 달리다가, 죽어서는 고향에 돌아가 자랑처럼 묻힐 것이다. 그런데도 너나할 것 없이 부족감을 느낀다.

사지가 멀쩡해도 부족감을 느낀다면 거지나 마찬가지다. 눈을 들어 세상을 보라. 어디를 가든 한 푼 줍쇼! 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엄밀히 따지면 우리 모두는 거지보다도 더 큰 거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거지라고 해서 더 불행한 게 아니고, 거지가 아니라고 해서 덜 불행한 게 아니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우리가 거지여서 불행한 게 아니라 거지 근성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지금의 나를 스토리텔링을 한다면, 우선 우리 자신의 내면에 깊숙이 숨어있는 거지 근성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앞의 두 거지가 거지이면서 거지 근성을 버리고 소비자인 타자를 먼저 생각했듯이.

그래야만 내 자신 속에 갇혀 있던 나의 눈에 타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타자가 내 눈에 보일 때 내가 하는 일의 정당성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고, 내가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된다. 타자가 눈에 보일 때 앞의 눈 먼 거지처럼 감성적인 카피로 불특정다수의 소비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며, 원만이 아저씨처럼 소비자를 먼저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으로 성공적인 마케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게를 차린 이는 손님에게 감동 줄 일을 생각하고, 가르치는 이는 학생들에게 감동 줄 일을 생각하고, 정치하는 이는 유권자에게 감동 줄 일을 생각하고,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에게 감동 줄 일을 생각하고,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감동 줄 일을 생각하고, 글 쓰는 이는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글을 쓰고, 노래하는 이는 팬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어떤 감동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라.

모든 관계의 가장 바람직한 커뮤니케이션은 감동이다. 즉 숨 쉬고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나의 관계에 대한 감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에겐가 감동을 주기로 결심한다면, 내가 어디에 있어도 내가 누구여도 상대가 누구여도 괜·찮·다. 지금 곧 Just do it! 일단 해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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