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로 쓴 소설 ‘청기와 집’ 1943년 총독상
음성군 94년부터 문화원 등과 함께 ‘무영제’

▲ 일제강점기 농민문학의 대부로 추앙받았던 이무영(본명 이갑룡)의 삶에는 그림자가 없다는 필명 무영(無影)과 달리 친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의 행적이 공인됐음에도 음성군은 군비로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또 동양일보는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 시상을 12년째 사실상 주관하고 있다.
음성출신의 소설가로 흙의 작가, 농민문학의 대부로 추앙받아온 이무영의 삶에는 ‘그림자가 없다(無影)’는 필명과 달리 짙은 친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무려 5쪽에 걸쳐 그의 친일행적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성군이 1994년부터 이무영을 기리는 ‘무영제’를 해마다 전액 군비로 개최하고 있어, 공공기관이 친일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사고 있다. 올해로 18회를 맞은 무영제는 이무영의 작고일인 4월20일에 맞춰 열리고 있으며 1995년에는 터미널 인근 거리를 무영로(無影路)라고 이름 지었다. 

1908년 음성에서 태어난 이무영(본명 이갑룡)은 1920년까지 음성·충주 등에서 자라며 학교를 다닌 뒤 일본으로 건너가 가토 다케오로부터 문학수업을 받았다. 1929년 귀국 후 교사, 출판사 직원을 전전하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소설가로 활약한다. 1939년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에 정착한 뒤에는 농민문학 창작에 열중했다.

이무영의 본격적인 친일행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1942년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소설·희곡회 상임간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일문 장편소설 <청기와집>을 연재했다. 청기와집은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연재소설이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홍콩을 점령할 때까지를 시대배경으로 하는데 청기와집이라 불리는 양반 권씨 집안은 ‘조선’을 상징한다.

청기와집의 가장 권 대감은 ‘지나(支那·중국의 음차)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진 구사상’, 아들 권수봉은 ‘영미 제일주의에 빠진 사상’, 손자 권인철은 ‘일본으로 상징되는 신사상’을 대변한다. 결론은 권 대감이 세상을 뜨고 수봉도 마음을 바꾸어 조선신궁을 참배하게 됐으며, 인철은 젊은 일본인으로서 개간사업에 몰두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무영은 같은 시기 문인협회가 파견한 만주국 시찰단의 일원으로 간도의 조선인 개척촌을 돌아보고 온 뒤 좌담회와 집필활동 등을 통해 “일본의 분촌(分村)이 조선에서도 시행됐으면 좋겠다”는 주장을 펼쳤다. 친일인명사전은 이에 대해 “일제가 조선에서 행한 정책적 농업식민을 조선인이 만주에서 재현하기를 기대한 아류제국주의”라고 비난하고 있다.

해방 후 대학에 출강하다 6.25 전쟁 당시 군에 입대한 이무영은 1955년 해군대령(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예편한 뒤 1960년 작고할 때까지 친일파 청산을 폄훼하거나 친일파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묘사한 다수의 글을 남겼다.

김기선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장은 “이무영의 친일은 단순한 친일이나 어쩔 수 없이 한 친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욱이 그는 훗날에도 반성하지 않은 1급 친일분자다. 그런데 유족이나 제자들도 아니고 음성군과 기관이 나서서 친일파를 기리는 것은 친일의 정당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음성군과 공동으로 무영제를 주최하는 반영호 음성예총 회장은 “이무영의 친일은 역사학자들이 얘기할 문제고, 우리는 이 고장이 낳은 흙의 작가의 문학적 위업을 기리자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 거부할 용기는

당선 시상금 500만원, 심사·진행비는 1000만원
동양일보 실질적 주관, 이제는 들러리는 ‘NO’

친일문인 이무영의 예술가적 명예는 해방 후 66년, 작고 후 51년이 지나도록 생생하게 살아있다. 무영제의 일환으로 지금까지 12명의 작가들에게 그의 이름을 딴 ‘무영문학상’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올해 수상작은 김도연(46·강원 평창군) 작가의 소설집 ‘이별 전후사의 재인식’이다.

무영문학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크게 두 가지다. 무영제와 마찬가지로 친일문인의 문학적 성취만을 인정해서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운영한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그 첫 번째다. 이는 이미 거론했으므로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족문학 진영의 작가들까지도 문제의식 없이 무영문학상을 수상해온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예를 들어 장편 ‘낯선 사람들’로 2007년(8회) 수상한 김영현씨는 실천문학사 대표를 맡고 있는 진보성향의 작가다.

김승환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심사하는 사람들의 체면도 있고 상을 거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이무영의 친일행적에 대해 사실상 공인이 된 만큼 의식이 있는 작가들은 상을 반납하려는 운동을 벌였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또 “이무영은 친일의 행적을 지우기 위해 반공주의자가 됐다. 군에 입대해 대령으로 예편함에 따라 문단에서 권력도 대단했으며 많은 작가들을 도와주고 제자들을 키웠다.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린 것만 봐도 편찬자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1966년 <친일문학론>을 통해 이무영의 행적을 비판한 임종국 전 민족문제연구소장으로부터 ‘그 이후로 내가 문학계에서 소외됐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문제는 무영제 예산 2000만원 가운데 1500만원이 문학상에 집중돼 있고 이를 특정언론사가 주물러왔다는 것이다. 1994년 음성군과 음성문화원의 공동 주최로 시작된 무영제는 1998년 5회 행사부터 음성군과 음성예총으로 주최가 바뀌었다. 문학상은 음성예총이 주최하면서 생긴 것인데 그동안 동양일보가 실질적 주관사로 예산을 사용해 온 것이다.

그러나 지난 2월 취임한 반영호 음성예총 회장은 예산을 토스(Toss)해주는 방식의 문학상 주관을 거부했다. 반 회장은 “내막은 모르겠으나 검찰에서 내사를 했다는 얘기도 있고 전체 예산 가운데 문학제·추모제 예산은 500만원인데, 문학상 예산이 1500만원이라는 것도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 우리는 추모·기념행사만 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문학상 예산의 관리는 우여곡절 끝에 올해부터 문화원이 집행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문화원 관계자는 “예산집행에 있어 모든 컨트롤을 우리가 하는 조건으로 예산을 받았다. 시상금이 500만원이고 나머지 1000만원이 문제인데 동양일보 문화사업단과 마찰도 있었다.

그러나 광고비의 경우 음성군에 자문을 받아 220만원으로 조정했다. 월간지 2곳 광고료로 99만원, 심사비 230만원, 인쇄비 330만원, 상패 55만원, 현수막 10만원, 진행비 56만원 등이 올해 집행내역”이라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