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흑백사진보다 빛바랜 칼라사진에 가슴이 뭉클한 나는 40대 중반이다. ○○당에서 냄비우동을 먹고 시쳇말로 ‘인증샷’을 찍는 것은 연례행사였다. 어린이날에는 중앙공원으로 가족나들이를 했다. 지금도 간혹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거리의 사진사가 당시로서는 귀한 칼라사진 샘플을 보여주며 호객을 했다. 사진사는 4×6사이즈를 권했지만 서민대중의 선택은 대개 3×4였다. 어린 기억에 그 당시 칼라사진은 지금보다 색이 강렬했던 것만 같다.

중앙공원에서는 사생대회가 열렸다. 주최하는 신문사의 도장이 찍힌 도화지에 단단한 크레용을 짓눌러가며 칼라사진처럼 강렬한 그림을 그렸다. 땡볕 때문이다. 그래도 공원의 중심에는 분수대가 있었다. 개구쟁이들은 어른들의 호통을 피해가며 분수대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때 그렇게 해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나이가 됐다.

청주시 남문로 2가 92번지. 그제나 지금이나 변치 않은 청주 중앙공원의 주소다. 인터넷에서 중앙공원을 검색하니 모두 7개의 중앙공원이 노출된다. 중앙공원은 그렇고 그런 공간인가?  

병영-관찰부-비림 천년 역사 보고

▲ 1000년의 터전 위에 조성된 중앙공원은 과거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청주시민으로부터 각광받는 휴식공간이었다. 사진은 1970년 중앙공원.
서원경 치소가 청주읍성에 있었다면 중앙공원은 1300여 년 전부터 이 나라의 의미 있는 장소였다. 고려시대에는 당연히 읍성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 효종 2년(1651)에 충청병영이 충남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왔는데 그 장소가 다름 아닌 현재의 중앙공원이다. 충청병마절도사영문이 지금도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령 800년의 압각수는 오리발처럼 땅을 딛고 서서 까짓 1000년의 세월을 기다리고 있다. 이색과 권근 등 이성계의 반대파들이 대거 청주옥에 갇혀 국문을 당할 때 천둥이 치며 큰비가 내렸고 옥관(獄官)들과 이색 등이 이 나무에 올라 물난리를 피했으며 이를 하늘의 뜻으로 안 조정이 이색을 포함해 중앙의 죄수 150명까지 풀어주었다는 역사가 깃든 나무다. 그저 옛이야기려니 했더니 ‘왕도 하늘은 두려워했다’는 교훈을 던져주니 고맙다.

중앙공원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비림(碑林)이다. 임진란 당시 청주성 탈환의 주역이었던 의병장 조헌, 승병장 영규, 지역의병장인 박춘무의 기적비가 줄지어 있다. 이 가운데 조헌 비의 조성연대는 숙종 36년(1710)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문 쪽으로는 한말 의병장 한봉수 송공비가 있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1976년 석교동 민가에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시민이 발견해 옮겨놓은 것이다. 비신은 하수구 덮개로 쓰기 위해 상단부를 절단해 양이(洋夷) 즉주(則主)가 떨어져나간 상태다.

▲ 1975년 어린이놀이터를 준공하면서 이곳은 청주의 어린이대공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현대사의 궤적도 중앙공원을 가로지른다. 과거 분수대가 작동하던 중앙에는 1949년에 세운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있다. ‘7만 시민 일동’의 이름으로 세웠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4.19 직후 기념비를 세웠으나 이듬해 5.16기념비로 대체됐으며, 현재 이 비는 청주문화관 뒤편으로 물러났다.

청주향약비, 사회단체기념비, 청주시민의 노래비, 어린이헌장, 청주시민헌장 등 현대에 이르러 비석이 난삽하게 늘어나는 만큼 공원의 정체성은 혼돈스럽기까지 하다. 소개하지 않은 몇몇 선정비처럼 돌에 새겨 영원히 남기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은 마음에 새겨져 전해지지 않는 한 그저 차가운 돌덩이일 뿐이다.

일제가 침략을 노골화하던 1908년 충북도청(당시 관찰부)이 충주에서 청주로 옮겨왔고 103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까지 도청이 이곳에 있었다. 2000년 복원한 망선루는 고려시대 관아건물이었다. 1921년 일제에 의해 철거됐으나 뜻있는 청년들이 육거리 제일교회에 옮겨지었으며, 2000년 원래 자리인 쥬네쓰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앙공원에 복원됐다.

‘관아공원으로 거듭나야’ 중론

지금은? 소외된 노인들의 섬이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1000년의 역사를 들추지 않더라도 현세가 이를 증명한다. 장현석 청주문화원장은 “1975년 어린이놀이터를 만들면서 중앙공원은 아이들의 공간이었다. 이후 청소년들이 점령하면서 ‘밤에는 교사들도 무서워 못 나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탈선의 공간이었다. 서서히 노인들의 쉼터가 됐는데 언제부턴가 도박과 노인 성매매를 상징하는 곳으로 변색됐다”고 증언했다.

장 원장은 또 “노인들을 내쫓자는 얘기가 아니다. 인근의 낡은 건물들을 허물고 놀이와 휴식, 일자리가 준비된 시설을 지어야한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과거를 실시했다는 망선루가 있는 곳 아닌가? 이곳에서 시조백일장이나 서예전, 국악행사 등을 연다면 품격에도 맞고 화젯거리가 될 수 있다. 청주시장이 직접 나서야한다”고 덧붙였다.

▲ 중앙공원의 점술가는 최근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사진은 1960년 풍경.

공원 이름부터 바꿔야한다는 것은 이미 지역 역사문화계의 중론이다. 충청병영이 있었고 이를 입증하는 영문이 존재함에 비춰 병영공원(兵營公園)으로 바꾸자는 것이 장 원장의 주장이다. 고건축전문가인 장 원장은 “충청병마절도사영문은 문설주에 홈이 남아있어 대문까지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다. 부챗살처럼 펴진 서까래나 처마를 하늘로 밀어올린 알추녀 등 나무를 다룬 솜씨가 궁궐목수가 일한 것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여기까지는 이름만 바꾸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판을 키우자면 청원군청 내에 있는 청주동헌까지 연계해 관아공원(官衙公園)을 만들어야 한다. 청주·청원통합으로 군청이 용도폐기되면 그때부터 시작할 수 있다. 참고로 제주특별자치도는 무려 11년에 걸쳐 도청, 법원·검찰청, 경찰청, 세무서 등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제주관아를 복원했다. 175억원 가운데 100억원이 국비였다.

장 원장은 문화재청 직원들이 내려오면 선물꾸러미를 들고 비행기 문 앞까지 따라붙었다더라. 지정문화재라고는 관덕정(보물 322호)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 엄청난 일을 해냈다. 강원도도 강릉, 원주 등에서 대대적인 관아복원을 진행 중에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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