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0일 충주고부터 청주 고교생들의 연합시위까지
4월 이후 학원민주화운동부터 농민,노동자 운동도 봇물

▲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운영위원장이 수집한 4월혁명관련 자료를 꺼내 보이고 있다.

올해는 4월 혁명이 51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3.15 부정선거와 자유당 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맞섰던 4월혁명은 마산의 부정선거 규탄투쟁과 김주열의 죽음이후 전국적으로 퍼졌고 충북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 10일 충주고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충북의 4월혁명은 어느 곳보다 뜨거웠고 4월 19일 이후에도 이어졌다.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운영위원장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용역을 받아 지역에서 일어난 4월혁명 연구에 대한 공동저술에 참여했다. 박 운영위원장은 당시 시위 참여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논문에 담아냈다. 증언이 엇갈리는 부분은 당시 신문들을 바탕으로 바로 잡았다
.

1960년 3월 10일 충주고의 학생시위는 학원을 정치도구화한 것이 계기가 됐다. 자유당 소속이었던 당시 홍병각 의원이 선거를 앞두고 학교의 협조 아래 이승만과 이기붕 후보 지지연설에 학생을 동원하자 학생들의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이 터져버렸다. 이에 충주고 학생들은 이날 오후 1시 시위를 벌였고 오후 5시에는 충주여고와 함께 2차 시위를 벌였다. 3월 13일에는 청주에서도 시위가 일었다. 청주농고 학생 50여명은 조회를 마친 후 “학원의 관권침투를 배격한다”등의 구호를 외치며 정문을 나왔다. 14일에는 청주고 학생 50여명이 시위를 계획하다 경찰의 경비강화로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시위는 4월에도 이어졌다. 13일 청주공고 기계과 학생들과 1학년 일부학생들이 청주역 앞에서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16일 오후 12시 10분에는 공고생 200여명이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회를 가졌다.

총과 방망이를 든 100여명의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했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18일 중앙공원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으나 기마경찰대가 공원을 에워싸 시위는 좌절되고 말았다. 18일에는 2500여명의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연합시위가 있었다. 아침 9시 청주고에서는 200명의 학생들이 중앙시장 인근 극장 앞까지 행진했고 청주공고에서도 12시경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연락책임자들은 청주여고와 청주농고 등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들은 청주상고와 청주여고 등으로 행진하며 학생들을 규합했다.

시위대는 도청으로 향했고 상당공원 근처에서 경찰병력과 마주쳤다. 소방차가 물을 뿌렸다. 아수라장이 되고 대열은 흩어졌다. 경찰은 이날 150여명을 연행되었다가 다음 날 새벽 석방됐다. 청주농고생 500여명은 19일 오전 조회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서쪽 샛길을 택하여 길을 잡아 철로를 따라 내덕동으로 이동하다 경찰과 마주했다. 경찰은 이내 자신들의 수가 적음을 알고 물러났다. 시위대는 도청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경찰에 의해 중앙초등학교 강당으로 인솔됐다. 당시 김상기 사찰과장은 단상으로 올라가 “너희들은 빨갱이들이므로 전부 체포한다”고 소리쳤다.

김 과장이 “주동자는 앞으로 나와”라고 말하니 당시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이던 김상현이 자신이 주동자라며 나섰고 이어서 전체 학생 모두가 주동자라고 외쳤다. 문학동 경찰국장은 시위자제를 부탁하여 전원 석방조치했다. 19일 시위에는 청주대 학생들도 참여했다. 오전 11시경 강당에 집결한 350여명의 학생들은 12시 정문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선거를 다시 실시할 것’과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마산사건의 고문경찰관 처단’ 등 5개 슬로건을 내걸었다. 규율부와 운동부선수들이 대오 앞에 섰다. 이들이 앞서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었다.

이후 우암교회가 위치한 곳에서 투석전을 벌어졌다. 경찰은 붉은 물감이 든 물대포를 쏘았고 진압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했다. 이날 경찰 트럭 2대에 90여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오후 2시에는 세광고 학생 200여명이 수업 도중에 학교를 나와 시위를 벌였다. 정작 20일부터는 시위는 소강사태에 접어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이 있던 26일이 돼서야 다시 시위가 일었다.

이에 대해 박 운영위원장은 “경찰의 탄압과 회유가 있었고 특히 학도호국단 간부들을 상대로 설득과 회유가 심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박 운영위원장은 “지역의 4월 혁명은 다양한 형태의 대중운동을 활성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노동운동의 활성화, 농민들의 수리조합 민주화운동과 엽연초 배상금 인상운동, 학원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4월 혁명 이후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학생자치회 조직됐고 충북대에서는 학장퇴진운동이 벌여졌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 때 학교 당국이 자유당의 시녀역할을 한 것에 대해 비판하며 제도적 개선책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학장에게 요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자 청주시내 문화동에 위치했던 학장 사택을 점거하고 연좌농성을 벌였다. 농성은 5월 11일부터. 6월 21일까지 이어졌고 송재철 당시 학장은 사퇴했다.

4월혁명 이후의 혁명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지역 노동계는 4월 혁명 이후 노조설립 착수했다. 당시 국내 유일의 기간산업체인 충주비료공장 노동자들은 5월 14일 노조 결성식을 가졌다. 당시 700명이던 직원 중 540명이 가입하는 등 분위기는 뜨거웠다. 5월 30일에는 청주시 초등교원노동조합이 출범했다. 교원 100여명은 청주 중앙초등학교 강당에 모여 노조창립식을 가졌다. 지역 노동계는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부당해고와 부정선거운동에 대한 규탄투쟁 전개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것이 청주전매공장 노동자들이 시위였다. 1000여명으로 구성된 이들 노조는 5월 10일 해고된 동료 이문석의 복직을 요구하며 집회를 열어 이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엽연초 경작조합원들의 배상금 인상운동도 광범위하게 진행했다. 국내엽연초는 우량엽연초로 해외 수출 전매이익금이 연간 230억환에 이르렀지만 전국 엽연초 농가들의 삶은 궁핍했다. 9월 13일 보은 엽연초 경작조합원 300여명이 1시간 동안 평화적 시위를 벌였고 진천겷뼁?음성 경작자 대표들은 10월 4일 진천 미호천 백사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엽연초 배상을 4~50% 인상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당국은 7% 협상안을 내놓았다. 시위는 11월까지 이어졌고 같은 달 11일 23% 인상에 합의했다.

박 운영위원장은 “1945년 해방 이후 처음으로 자유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펼칠 수 있었던 시기”라고 말하며 “4월 19일 이후 당시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민주화 욕구가 다양하게 뿜어져 나왔다”라고 전했다. 박 운영위원장은 “그동안 지역에서 일어났던 4월혁명에 대한 연구는 사실 부족했었다. 개인의 회고록을 제외하면 지역의 4월혁명에 관한 연구가 더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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