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의 하늘을 날았던 영웅 안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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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의 하늘을 날았던 영웅 안창남
  • 이재표
  • 승인 2011.04.01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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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첫 민간비행사, 모국방문 대비행회에 5만명 모여
돈과 명예 버리고 중국망명, 항일결사 활동 중 추락사



떴다 보아라 안창남

▲ 1922년 자신의 비행기 금강호를 타고 모국방문 비행회를 열었던 안창남.
산(山)사나이가 산에서 죽는 것이 영광이라는 역설처럼 창공을 나는 하늘의 사나이는 하늘에서 죽는 것이 가장 완벽하다는 공식이 통하던 시대가 있었다. 인간이 동력을 이용해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꿈이 실현되기 시작하던 그 무렵이었다.

2차 대전 중 군용기를 조종하다 실종된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가 그랬고, 중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꿈꾸며 비밀결사를 움직였던 천재 비행사 안창남이 그랬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기를 이용해 처음으로 지속적인 비행에 성공한 뒤 불과 17년이 흐른 1920년 안창남은 일본에서 민간비행사 시험에 최초로 합격했고 1922년 여의도 비행장에서 인천까지 고국방문 비행 행사를 가졌다. 지금으로 치자면 에어쇼에 해당하는 이 행사에는 무려 5만 명에 이르는 관중이 모였다. 당시 서울 인구는 약 30만 명이었으니 그와 함께 날아오른 것은 식민지 조선의 꿈이었다.

안창남은 1901년 3월19일 서울에서 태어나 1930년 4월2일 중국 산시성 타이위엔에서 추락사했다. 시기로 보면 지금은 안창남의 탄생을 기념하는 기간이자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조실부모하고 후손도 없이 세상을 떠난 그를 기리는 기념사업회는 뜻밖에도 청주에 있다. 20여 년 동안 영웅 안창남을 홀로 사모해 온 박정규 전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회장을 맡고 있다. 박 회장은 안창남 탄생 100주년이던 2001년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유공을 신청했고, 같은 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안창남이 조선 최초의 비행사였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배웠던 가물거리는 상식이지만 그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진실이다.
 
   
▲ 안창남을 독립투사로 되살린 사람은 박정규 안창남 기념사업회장이다.박 회장은 옛 신문에서 영웅 안창남을 발견하고 그의 독립운동 자취를 찾아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안창남의 영전에 바쳤다. 사진 속 책은 안창남의 존재가 조국에 소개된 개벽 1920년 12월호. 기사를 쓴 사람은 개벽 도쿄특파원 방정환이었다.
박정규 회장은 청주대 교수협의회장을 맡아 재단과 투쟁하던 1998년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그는 해직교수로 13년을 보냈다. 이제는 아니다. 박 회장이 계속 청주대에 근무했더라면 지난 2월28일이 정년퇴임일이기 때문이다. 박 회장에게는 고난이었을 그 시간에 빛나는 업적이 쌓였다. 
 
언론학이 전공인 박 회장은 옛날 신문을 뒤졌다. 박 회장이 단재 신채호와 관련해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인자 수집가가 된 것도, 박 회장의 표현대로 영웅 안창남을 발견한 것도 이 작업을 통해서였다. 박 회장을 청주의 한 개인사무실에서 만난 28일에도 그는 경매를 통해 사들인 해방 직후의 빛바랜 경성일보 2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1922년 12월10일 ‘안창남 모국방문 대비행회’를 주최한 것은 동아일보였다. 서너 달 전부터 전기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행사 직후에는 모든 지면을 여의도 비행장 전경을 비롯해 안창남 스토리로 채웠다. 당시 서울 인구가 약 30만명인데 동원 없이도 5만명이 모였다는 것은 동포들에게 우리도 비행사를 가졌다는 자긍심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박 회장이 안창남을 주목한 이유다.

안창남이 조국에 알려진 것은 이보다 2년 앞선 1920년 12월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잡지로 수만 권이 팔리던 개벽 당월호에 ‘조선비행가안창남(朝鮮飛行家安昌男)’이라는 기사가 실린 것이다. 기사를 쓴 기자는 어린이 인권운동가로 알려진 방정환이다. 방정환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사위로, 개벽의 도쿄 특파원을 지냈다. 안창남에게는 미동공립보통학교 2년 선배이기도 하다. 안창남은 이 잡지에 ‘오구리 비행장에서’라는 수필을 싣기도 했다. 그의 민족의식은 이 글에서 이미 강하게 드러난다.

공명단 국내투쟁자금 지원

당시 비행사는 비행가라는 호칭이 붙었을 정도로 신망의 직업이었다. 일본 오구리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로 임용됐으며, 일본에서 최초의 민간비행사가 된 그는 한류스타의 원조라고 봐도 무방하다. 안창남은 1922년 11월 도쿄-오사카 왕복 우편비행 시합에서 우승한다.

박 회장은 “당시 비행사는 여객·화물의 운송보다는 유람비행, 삐라 살포 대행, 비행기술 교육사업 등으로 고소득과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직종이었다. 그런데도 안창남은 이로부터 2년 뒤 중국 망명의 길을 택했다”고 강조했다. 1924년 12월은 진정한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중국 산시성(山西省)으로 건너간 안창남은 산시성의 군벌 옌시산(閻錫山)의 후원을 받아 산시항공항교의 교관으로 연습생을 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러나 안창남의 관심은 독립운동에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부터 수차례 비행대회에서 우승해 모은 돈과 옌시산의 총애로 받은 교관의 급여 등 거금 600원을 비밀결사 공명단의 국내투쟁자금으로 지원했다.

박 회장은 “안창남은 유기석, 이용화 등의 동지들과 함께 공명단을 조직했고 1929년에는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항공사관학교를 만들려는 거사를 위해 단원들을 국내로 잠입시켰으나 이들이 체포돼 무산됐다”고 설명했다. 공명단은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공판기록에는 안창남의 역할에 대한 내용이 없다.

그러나 당시 매일신보는 ‘제남서 안창남씨에게 육백원을 위선바더(濟南서 安昌男氏에게 六百圓을 爲先바더)’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안창남의 연관사실을 보도한다. 또 당시에 체포됐던 최양옥이 해방 후 쓴 수기에서도 안창남이 공명단의 주축이었다는 사실이 거론된다. 박 회장은 이 같은 진실을 추적해 안창남의 영전에 건국훈장을 안겼다.

안창남은 1930년 4월2일 산시비행학교 부근에서 비행기를 몰던 중 추락해 숨진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산시성 타이위엔(太原)에 묻혔다. 그는 중국에서도 한류였다. 박 회장은 지난 1월  ‘KBS 역사스페셜’ 팀과 함께 타이위엔을 찾았다. 그의 무덤은 봉분도 없이 사라졌으나 지금도 안창남과 비석이 쓰러져 뒹굴던 그의 무덤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있었다.

박 회장은 “안창남의 삶에는 강렬한 이야기의 요소들이 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희망과 도전정신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인물이다. 안창남 기념관을 만들고, 영화나 뮤지컬도 제작해보고 싶다. 청주에 그의 기념관이 들어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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