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딘 봄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없이 돌아간다

발길이 멈추는 곳, 충북
정상희/ 충북도청 공보관실 뉴미디어 담당

점심나절이 되어서야 옥천 구읍에 도착했다. 구읍 사거리에 서서 한참을 망설인다. ‘더딘 봄 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없이 돌아간다’는 시 ‘홍춘’을 걸어 놓은 문정식당으로 갈 것인가.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어 이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란 시를 써 놓은 ‘산모루’ 식당으로 가 볼까.

시구절을 따라 구읍 안쪽까지 걷다가 결국, 구석진 골목 안에 위치한 묵밥집으로 향한다. 평상에서 말리고 있는 묵 껍질은 충청도만의 별미로, 묵밥을 먹는 다는 건 옥천 여행 중 빼 놓을 수 없는 맛 기행 중 한 하나다.

옥천의 낡고 오래된 마을 이름은 그대로 ‘구읍(舊邑)’이다. 죽향리와 상·하계리, 문정리와 교동리 이렇게 다섯 마을이 모여 구읍을 이룬다. 조선시대 600년 동안 관아가 있던 중심지.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남쪽에 옥천역이 생기자 급속도로 쇠락하고 만 곳. 그러나 그 덕에 고스란히 옛 읍내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쇠락한 읍에는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한 때 고래등 같이 즐비했던 한옥, 소달구지가 몰려들던 옥천 최대의 정미소. 중국인 왕서방이 하던 비단가게도 그곳에 있었다. 쇠락한 읍에는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구읍을 대표하는 것은 단연 시인 정지용이다.

그는 실개천변의 청석다리 너머 초가집에서 나고 자랐다. 구읍 사람들은 정지용에 대한 자부심은 너나없이 대단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공공예술프로젝트 사업이 진행되며 생가 주변의 구읍 상점들이 정지용의 시를 적은 간판으로 바꿔 달겠다고 나서더니, 더러는 아예 시 구절에 맞춰 가게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니 구읍사거리에 서 보면 도처가 시(詩)다. 간판만 읽으며 다닌대도 봄날의 서정에 흠뻑 빠질 듯하다. ‘모초롬 만에 날러 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 가여운 글자마다 먼 황해가 님설거리나니….’ 구읍 우편 취급국 간판에 걸린 ‘오월소식’ 시 구절을 보니 문득 그곳에 들어가 편지를 부치고 싶어진다.



우편 취급국은 100여년 전 부터 약방과 담배가게를 하면서 우표를 팔던 곳. 지금도 우편물을 접수하는데 하루 10통 남짓의 손편지가 이곳 취급국에서 부쳐지고 있다.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드시 우로!’ 구읍 정미소 벽에 걸려 있는 시구. 아직도 뽀얀 먼지를 날리며 탈탈탈탈… 정미소는 돌아간다. ‘어리둥절 어리석은 척 옛 사람처럼 사람 좋게 웃어 좀 보시오’란 시 구절이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혜선상회 간판.

시를 따라가는 여정은 구읍에서 옛 37번 국도를 따라 장계관광지까지 이어진다. 정지용 생가가 있는 구읍 문정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옛 37번 국도로 이어지는 장계관광지의 ‘멋진 신세계.’ 이 아트밸리를 ‘향수 30리’라 부른다. 정지용 시인의 시를 읊조리며 그가 태어났던 고향집, 그가 거닐던 골목길, 그리고 그의 시를 추억하며 길을 걷는 것도 좋겠다.

모더니스트였던 정지용을 착안해 ‘모단(모던)’이란 이름을 쓰는 광장과 가게. 갤러리를 비롯해 통창으로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프란츠카페 등이 들어서 있다. 멋진 신세계는 정지용의 시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상(詩想)이다.

이 시상을 테마로 정지용의 20개의 시문학비와 지용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의 시들과 조각 작품들로 꾸민 예술 공간이 바로 ‘멋진 신세계.’ 내륙의 오지라 불리는 옥천에 이런 아름다운 예술공간이 숨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모단가게 아래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대청호를 따라 걸으며 여러 시인들의 시비와 조각작품들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는 공간.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를 날리는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와 손 잡고 산책하고 싶은 길이다.

모던갤러리 앞에는 두 개의 편지함이 있다. 과거로 보내는 편지함과 미래로 보내는 편지함.정지용 생가 골목에서는 옥천의 과거를 보았고, 이곳 멋진 신세계에서는 앞으로 펼쳐질 옥천의 미래를 보았다. 나는, 미래로 보내는 편지함에 내 마음을 넣고 돌아왔다.

●주변 가볼만한 곳
최대한 몸을 낮추고 바라봐야 다 보이는 삼양성당. 옥천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와 우회전 한 후, 옥천군청으로 가면 된다. 삼양성당은 옥천군청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떠나기 전, 삼양성당까지 둘러봐야 비로소 옥천을 제대로 감상했다,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