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시간 길지만 정보 열려있고 치료방법 환자·가족이 결정
장기입원 어렵다지만 동선 고려해 ‘주택구조 변경’까지 지원

김미경 前 청주YWCA 여성종합상담소장

김미경 전 소장은 2009년 9월부터 캐나다에 살고 있다. 또 캐나다로 이민한 여동생을 따라 5년 전 이민한 김 전 소장의 부친은 두 달여 전 혈액암 판정을 받고 입원치료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무상의료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이 때 환자 가족으로서 캐나다의 무상의료를 체험한 김 전 소장의 글을 싣는다.

누가 무상의료를 좌파논리로 매도하는가

10일간의 1인실 입원과 골수검사를 비롯한 수없이 많은 검사를 마치고 퇴원하시던 날, 우리는 정말 단 한 푼의 치료비도 지불하지 않고 병원을 나왔다. 한국에 사는 형제들은 몇 번이나 물어본다. “정말 돈이 조금도 안 들었어?” 그렇다. 나의 영어선생 N의 남동생이 뇌종양수술을 받았을 때 내가 그녀에게 거듭 질문했던 것과 똑같다.

▲ 종합병원 토론토 제너럴 (TORONTO GENERAL HOSPITAL) 전경과 기부자의 이름을 딴 PETER MUNK CARDIAC CENTER 간판
비슷한 상황을 맞은 한국의 자녀라면 갑작스런 병환으로 충격에 빠진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기도 전에 치료비 걱정부터 앞서는 게 솔직하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무상의료가 환자와 환자 가족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캐나다의 의료비는 연방정부의 보조금과 주정부의 재원으로 조달되어 주정부마다 재원 확보 방법이 다르다. 토론토시가 속한 온타리오주는 그동안 별도의 의료보험료가 없었으나 몇 년 전부터 소득세에 포함되어 연간 최고 900불까지 징수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BC주처럼 별도의 의료보험료를 내는 곳도 있다. 

처음 응급실에 갔을 때 ‘미국에서는 돈이 없어 죽고 캐나다에서는 기다리다 죽는다’ 는 소문처럼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 때문에 무척 불안했다. 그 후 일단 병의 원인에 대한 가닥이 잡히기 시작하자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 1인 병실에 입원을 할 수 있었고, 다른 병원의 혈액암 전문의에게 검사가 인계되었다.
이곳 응급실에서는 외상이 심한 환자나 구급차에 실려 오는 환자가 가장 신속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반면 만성적인 통증이나 내과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전문의를 만나거나 검사를 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과연 이 나라에서도 정치인이나 재벌들이 검찰조사와 사법처리를 피하기 위해 고의로 입원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치료방법 결정도 가족이 한다

병실이 부족한 이곳에서는 한국처럼 장기입원 치료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5년 전 출산한 여동생은 자연분만 후 영양주사 하나 없이 오렌지 주스 한 잔 마시고 나가라던 병원의 처사가 야속하더란 기억을 갖고 있다. 우리 가족도 감염과 골절에 치명적인 혈액암 환자를 집으로 모셔야 하는 일이 걱정스러웠고, 한국의 의료서비스가 그리웠다.

하지만 퇴원 다음날 환자 안전을 진단하는 전문가가 가정을 방문해서 생활공간과 동선을 찬찬히 살피더니 정부지원으로 목욕탕의 안전 손잡이를 설치해 주고 걸음걸이를 보조하는 기구와 목욕의자 등을 보내 주었다. 돌볼 가족이 없는 환자인 경우는 주 1회 목욕과 투약 등을 도와주는 생활도우미 (CARE GIVER)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퇴원 후 통원치료를 하며 만난 혈액암 전문 의사는 병의 특징과 치료에 대한 정보를 담은 자료들을 한 무더기 안겨 주며 연계된 병원에 속한 전문의 예약을 줄줄이 잡아 주었다. 대화는 삼자 통화 통역으로 이루어졌는데 환자가 많이 밀려 있는데도 시간을 들여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의사의 태도가 인상적이었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병원에 설치된 컴퓨터로 환자치료 투약 경과와 예약 현황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다.

또 병원 안에 도서관이 설치되어 있어 각종 질병과 치료 관련 정보도 얻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의사는 환자에게 화학치료를 할 것인지, 약물치료를 할 것인지 가족들과 상의해서 결정해 오라고 했다. 의사가 결정하지 않고 환자와 가족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낯설고 어려웠지만 모든 정보가 환자에게 공개되고 치료방법을 결정할 때 환자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다는 점에서 존중과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돌봄서비스 잘 돼 있는 나라

대부분의 캐나다인들은 공공의료서비스를 당연히 여기고 신뢰하며 흐름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응급실에서 큰소리 내는 사람 하나 보지 못했다. 아무리 느려도 기다리고, 병실이 없으면 집에서 병원을 오가며 치료한다. 대중교통을 비롯한 사회서비스가 환자와 장애인을 잘 배려한다. 사람들은 평소에 예방과 운동, 건강식품을 애용하여 건강관리 잘 하고 병원신세를 지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리고 토론토 교육청과 건강국은 연계되어 꼼꼼하게 어린이 예방주사 현황을 관리한다.

그런가하면 건강한 사람들이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그러다가 병에 걸리면 다른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으며 치료 받고 죽음을 맞으면 병원이나 환자들을 돕는 단체에 유산을 기부한다. 병원 간판마다 기부자의 이름을 딴 연구소나 전문치료센터가 쉽게 눈에 띈다. 치료 후 환자의 재발방지를 위한 네트워크가 활발하다. 또 이민자나 외국인을 위한 의료서비스도 많다. 병원마다 통역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각 나라별 커뮤니티에 건강검진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인맥과 돈, 수단을 모두 동원해 국내외 병원을 골라 다니며 부모님 병수발을 하는 게 효의 기준이라면 나는 불효자다. 반면 환자에 대한 위로와 안정적 치료, 놀란 가족에 대한 위로를 먼저 할 수 있게 해 주는 캐나다의 의료제도 덕분에 훨씬 자식 노릇이 쉽다.

‘돈이 없어서 의료혜택을 못 받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의료는 모두에게 자유로워야 한다’는 토미 더글라스(캐나다 의료보험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치인)의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에게는 이 제도가 부럽기만 하다. 이런 제도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비용뿐 아니라 사회적 합의와 수준 높은 시민의식, 자원봉사와 기부문화 같은 많은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 환자와 가족을 위한 병원 도서관 (PRINCESS MARGARET HOSPITAL)
▲ 입원실 내부 (TORONTO GENERAL HOS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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