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노래> 연재를 마치며

▲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충청리뷰>의 배려로 지난해 8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7개월간 <시인과 노래>라는 제목으로 한국 가곡 이야기를 연재하였다.

아름다운 우리 가곡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한번은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시작하였다. 막상 자료를 하나 하나 찾아가며 들어가보니 과연 노래 한곡 한곡 전부 애달픈 사연들을 담고 있었다. 우리 가곡 속의 그리움과 슬픔과 기쁨은 모두 우리네 삶과 역사의 자취이다. 한국 가곡사는 바로 우리 민족 수난사의 일부였다.

또한 그 노래나 노랫말에 얽힌 내용들이 그동안 사실과 다르게 알려져온 것들도 적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마음이 아팠던 적이 많았다. 질곡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우리 조상들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운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보자. 어느 한 시절도 평화롭고 편한 때가 없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후부터 지난 100여년간은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배, 국토분단과 좌우대립, 동족상잔의 6.25 전쟁, 그후 남북간 대립의 심화, 과거엔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라고 종종 표현하기도 했지만, 남북이 각기 이념과 체제를 공고히하기 위해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해온 불안과 혼돈의 시대였다. 총체적으로 고난과 시련의 역사였다.

지금의 노년층까지를 포함하여 우리 조상들이 겪어온 이러한 가슴 쓰린 최근의 우리 민족사에 생각이 미치면 서글프다. 특히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백성으로서 느꼈을 수모와 참담함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32세로 자살한 김소월의 죽음이 일본 경찰의 핍박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그래서 일리가 있다고 본다. 일제가 조선을 상징하는 무궁화꽃을 문학작품 등에 쓰지 못하게 하여 삼천리 반도에 지천으로 피는 진달래꽃으로 무궁화꽃을 대신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그래서 붙여진 제목일까? <바위고개> 가사 중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는 그러한 울분의 소리였다는데….

말이 있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글이 있어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암울한 고통의 세월 동안 우리말로 된 시를 쓰고 그것을 가사로 하여 가곡을 꾸준히 발전시켜 온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찬사를 보내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곡의 역사와 관련하여 충북이 자랑으로 생각하는 정지용 시인의 경우는 40년간이나 남북 양측으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비극적이고 불행한 예이다.

남북분단상황에서 작가의 월북 또는 납북은 가곡의 운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위고개>는 극작가였던 이서향이라는 원래의 작사자가 월북한 후 작곡자 이흥렬이 작사와 작곡까지 모두 한 것으로 슬그머니 이름을 바꿔 운 좋게 살아남았고 가곡으로서 인기도 누렸다. 그러나 월북으로 오해받았던 정지용의 <고향> 등 가사는 사장되어 수십년간 빛을 보지 못했다.

소월과 동갑이었던 정지용은 6.25 전쟁 때 사라졌는데 어디서 사망했는지도 모른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후 해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후손들이 입은 회복 못할 상처는 과연 무엇으로 보상이 되겠는가?

한국민의 서정성과 향토성, 민족애 등을 음악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우리 가곡은 1920년 홍난파 선생의 봉선화를 그 출발로 보고 있다. 일제하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0~70년대 이후 지금의 신작 가곡들은 과거에 비해 그 분위기도 밝고 높은 예술성에 경향도 새로워졌으나, 요즘은 가곡의 대중적 인기가 전만 못하여 좋은 노래들이 빛을 못 보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과 노래> 시리즈에서 다룬 가곡들은 일부를 제외하곤 대체로 널리 알려진 가곡들이다. 이번 연재가 독자들에게 한국 가곡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다소의 도움이 되었다면 보람으로 삼겠다.

가곡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서 가곡에 대한 이해와 감상이 널리 전파되어 우리 가곡이 온 국민의 관심과 사랑 속에 한층 더 발전하게 되었으면 한다. 소중한 연재의 기회를 주신 <충청리뷰>에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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