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걸순 충북대 교수 당시 대만신문 보도 통해 확인
<한국독립운동사연구 봄호>에 관련 논문 등재 예정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일경에 붙잡힌 장소가 대만 기륭항이 아니라 기륭우체국이라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오는 4월 권위 있는 학술지에 실린다. 문제의 논문은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가 쓴 ‘신채호의 아나키즘과 동방피압박민족 연대론’으로 4월에 발간되는 계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봄호>에 실릴 예정이다.

아나키즘과 국제연대를 통해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했던 당시의 사조를 서술한 이 논문의 16,17쪽에 단재 신채호가 일경에 피체되는 상황이 당시 대만의 일간지였던 ‘대만일일신보(臺灣日日申報)’의 1928년 5월12일자 보도를 인용해 서술돼 있는 것.

▲ 1928년 5월 12일자 대만일일신보에는 신채호 피체관련 2건의 기사가 실렸다. 보도에는 신단재, 또는 신채호라는 이름이 직접 등장한다.
인용된 일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단재가 피체되던 시점은 1928년 4월23일 북경화북물산공사 구좌로부터 유문상(劉文詳)이라는 명의로 위조 위체 2000원이 대북우편국으로 송금된 것을 시작으로, 신죽, 기륭, 대중, 대남, 고웅 등 각 우편국에 북경화북물산공사 명의의 위체가 잇따라 발견돼 대만 당국이 비밀리에 수사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5월8일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던 신채호 선생이 배편으로 일본에서 기륭항을 통해 입국한 뒤 기륭우편국에 나타난 것이다.

단재 선생은 선객 명부에 ‘북경전문내안복 유문상 호 맹원(北京前門內安福 劉文詳 號 孟源)’이라고 적었고, 위체의 수신인 이름을 선객 명부에서 확인한 일경의 미행을 받던 중 기륭우체국 위체계 창구에서 지급청구서에 서명하고 돈을 찾으려다 기륭수상파출소 여세산(與世山) 형사에게 붙잡혔다는 것이다.

일일신보는 유맹원의 신원이 ‘조선 충청남도 오주군 산내인(山內人) 신단재(申丹齋) 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일신보는 또 단재가 유치장에 갇히며 ‘맹연반항(猛然反抗·맹렬하게 저항)’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단재 선생의 피체지가 그동안 기륭항으로 굳어진 것은 같은 사안에 대한 조선일보 보도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사건 발생 후 6개월 여가 지난 1928년 12월28일 ‘신채호가 유병택이라고 변명한 후 책임액 1만2000원을 찾기 위해 일본 문사을 거쳐 환춘환(桓春丸·배이름)으로 대만 기륭항에 도착해 상륙코자하는 즈음 기륭수상경찰서에 발각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박걸순 교수는 “단재 피체 과정이나 장소에 대해 기륭항에 상륙하려다가 그 직전에 피체됐다거나, 1만2000원을 인출해 대만 기륭으로 도피하다가 피체된 것이라는 등의 오류는 수정돼야 한다”며 “소소한 부분일 수도 있지만 독립투사의 꿈이 접힌 장소라는 점에서 그동안 잘못 알아온 것에 대해 죄송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사 가운데 사학사(史學史)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 교수는 독립기념관이 주관한 신채호전집(총 10권) 편찬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2008년 대만일일신보를 입수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 대만일일신보의 보도를 근거로 단재의 피체지가 기륭항이 아닌 기륭우체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은 1900년대 초 기륭우체국. 기륭우체국은 일제가 기륭의 랜드마크로 지은 건물이다.
*이 내용에 대한 심층기사는 3월4일자 충청리뷰에 보다 자세한 내용으로 다시 실릴 예정입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