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에서 동시에 수난 당한 정지용의 작품

▲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1941년까지 <정지용 시집>(1935)과 <백록담>(1941) 두 권의 시집을 간행하는 등 활발한 시작 활동을 했던 정지용은 점차 높아져가는 시대적 압박 속에서 번민하게 된다. 그는 1942년 전쟁협력시 <이토(異土)>를 쓴 후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창작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사실상 은둔에 가까운 세월을 보낸다.

해방 후 좌우 대립 속에 극도로 혼란스럽던 몇 년이 흐르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정지용이 사라졌다.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한 뒤 녹번리 집에서 북의 정치보위부에 자수하러 간다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월북인가 납북인가 설이 분분했다.

그가 1949년에 우익으로 전향하기는 했지만, 해방 후 한때 좌익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몸담았던 관계로 월북설이 유력했다. 그의 월북 의혹으로 남한에서 그의 모든 작품은 이후 사용이 전면 금지됐다.

실제로 정지용의 작품이 금지되기 시작한 것은 전쟁 한해 전부터이다. 1949년 10월 ‘국가이념에 위반되는 저작물 등은 일절 발금(發禁: 발매 금지)한다’는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중등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고향> <꾀꼬리와 국화> 등 정지용의 작품들이 전부 삭제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정지용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는 이해 11월 이승만 정부가 우익 전향을 유도하기 위해 만든 국민보도연맹에 자진 가입한다. 그러다가 전쟁을 맞은 것이다.

“북쪽의 정치보위부는 그때 출두한 전향자를 한 사람도 석방시키지 않았다. 정지용도 예 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정치보위부에서 취조를 당하다 사망했거나 평양감옥에서 폭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평전> 이석우·푸른사상·2006
정지용의 작품은 1988년에야 해금이 됐다. 40년 가까운 세월이다.

▲ 벌교 채동선 음악당의 _'고향_' 액자. 보성의 문화해설가 김성춘(일명 춘향이) 시인이 2007년 음악당 개관 때 기증한 것이다.
북한에서는 어떠했는가? 전쟁 전 우익으로 전향했던 반동작가라고 해서 그의 작품들 역시 남한에서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북에서도 그의 모든 작품의 사용이 금지됐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2년에야 김억, 김소월, 신채호, 한용운 등과 함께 해금이 되었다.

그의 셋째 아들 정구인이 2001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남한에 있는 아버지 정지용과 큰 형 정구관을 찾는다고 신청을 했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정지용의 사망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6.25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해 9월 25일 미군의 평양 폭격 시 사망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울 인근 소요산을 지나 북으로 가다가 미군기의 기총소사에 사망했다는 설이다.

아무튼 전쟁통에 어디선가 죽었으나 아무도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알지 못 한다. 남과 북에 아들들이 흩어져 살았으나 아버지가 어디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 옥천 정지용 문학관앞의 정지용 상
북의 아들은 아버지가 남한에 남아 있었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버지 정지용 때문에 남은 자식들은, 남에서는 월북자의 자식, 북에서는 반동의 자식이 되어 남북 양쪽에서 모질고 슬픈 세월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북한의 삼남 정구인은 2001년 2월 서울에서 큰 형 구관과 누이동생 구원을 51년 만에 만났다. 모친 송재숙은 1971년 3월 서울 은평구 역촌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2000년대에 나온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는 정지용이 1950년 9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있다.

이런 수난의 역사 속에서 가곡이 되어 일제 때부터 유명했던 정지용의 <고향>은 수십년간 역사의 수면 아래로 사라졌었다.

<그리워> 논란

1988년 남한에서 정지용의 시가 해금된 후 <고향>도 당연 되살아났다. <고향>과 더불어 그의 대표시 중 하나인 <향수>는 1989년 대중가요 작곡가 김희갑씨가 새로 곡을 붙였는데 통기타 가수 이동원과 서울음대 교수인 테너 박인수가 듀엣으로 불러 히트를 했다. <향수>는 채동선 곡 외에 <명태>의 작곡자 변훈의 곡도 있다.
<고향>이 살아나긴 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가곡 팬들도 <망향> <그리워> 등에 익숙해져 있어. <고향>이란 가곡은 듣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2010년 6월, 이은상의 <그리워>가 정지용이 1920년대에 쓴 <그리워>와 중요 구절이 똑 같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후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 충청리뷰는 6월 9일자에 ‘이은상, 정지용 시 <그리워> 베꼈나’란 제목으로 이를 보도했고 이후 몇몇 언론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 '정지용 사전_'에 실린 새로발굴된 정지용의 (그리워) 복사
정지용의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어디러뇨
동녘에 피어있는 들국화 웃어주는데
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보노라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옛추억
가슴 아픈 그 추억 더듬지 말자
내 가슴엔 그리움이 있고
나의 웃음도 년륜에 사겨졌다니
내 그것만 가지고 가노라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고향은 없어
진종일 진종일 언덕길 헤매다 가네

출처: ‘1920년대 시선 3’ 평양문학예술종합출판사·류희정 편·1992

이은상의 <그리워>는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 그리운 옛 님은 아니 뵈네 /---”로 시작하는데, 중간의 “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 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마지막 연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매다 가네” 등 주요 구절이 사실상 똑 같다. 마치 이은상이 정지용의 <그리워>시를 알고 있었던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북한 자료에서 정지용의 <그리워>를 찾아내 2002년 문학사상 10월호에 이를 처음 공개한 고려대 최동호 교수는 특집으로 실린 ‘정지용 시 세계의 뿌리 탐색’에서 이 작품은 정지용이 고향 의식을 표현한 시 <향수>와 <고향> <녯니약이구절>등의 원천이 된다고 설명했다.

정지용의 <그리워>는 1992년 평양문학예술종합출판사가 펴낸 ‘1920년대 시선 3’에 실렸는데, 최교수는, “이 작품은 출전이 분명하지 않지만, 그 내용을 확인해 보면 정지용의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최교수는, 이 작품이 1932년 발표한 <고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한 <그리워>의 문제를 처음 발견한 것은 필자였다. 하지만 그같은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이를 처음 보도한 <충청리뷰>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될 일’(2010년 7월 1일자)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어찌되었든 이 모든 것은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의 산물이다. 가곡 <고향>의 역사는 바로 최근 한세기 우리 민족의 수난사이다. 지난 100년, 우리 선조들이 어떠한 고난의 역사를 살았는지 이 한편의 노래가 잘 웅변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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