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도종환 시인의 집..콘크리트 넣지 않은 천연 황토흙집
커다란 통유리, 재미있는 벽화,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 눈길

문 앞에 걸어놓은 재미있는 모양의 ‘구구산방’ 서각. 이 집을 지은 미술교사 작품이다.
교사 도종환은 지난 2003년 학교에 사표를 냈다. 건강악화 때문이었다. 그가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되자 수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불렀다. 교사로만 살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바쁜 생활이 이어졌다. 이후 10년만에 교단으로 복직했다. 하지만 바쁜 생활은 여전했다. 그러자 어느 날 부턴가 몸에 무리가 왔다. 본인은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져 생긴 병”이라고 스스로를 진단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들과 헤어진 그는 이후 곧장 시골로 들어간다. 바로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에 있는 구구산방이었다.

이 집은 도 시인과 전교조 활동을 같이 했던 한 미술교사가 지었다. 몸이 아픈 동생을 위한 집이었다. 이 교사는 동생과 일일이 흙벽돌을 찍고, 포크레인까지 사서 궂은 일을 다했다. 마침 동생은 건축일을 했다. 흙벽돌은 황토흙과 볏짚을 썰어넣은 것으로 콘크리트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순수한 황토흙집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한쪽에 사우나시설까지 만들었으나 현재는 폐쇄됐다.

구구산방 전경.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은 시원한 통유리가 있다는 것이다. 거실에서 바깥경치가 다 보이고, 햇볕도 잘 든다. 사진/육성준 기자

구구산방(龜龜山房)이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오래 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몸이 아팠던 교사의 동생은 집을 지은 뒤 2년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이 집은 한동안 비어 있었다. 그러던 차 도종환 시인이 건강상의 문제로 학교를 그만두자 이 집을 내준 것. 고맙게도 시인은 건강을 회복했고, 후에 이 집을 샀다. 원주인은 근처에 흙집을 다시 지었다.

바깥경치 환하게 보이는 통유리
시인의 집은 청주에서 보은쪽으로 가다 피반령고개를 넘어선 뒤 내북면으로 접어들어 한 참을 달려야 한다. 그러다 법주리라는 표지판이 나오면 좌회전 해서 들어선 뒤 또 한참을 간다. 법주리 내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다. 길을 잃고 헤매다 지나가는 어르신한테 물으니 "선생들 많이 사는데 찾느냐"고 한다. 선생들 집은 도 시인의 집 위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을 가리키는 것이다.

법주리에는 시인 윤석위, 교사 김이동·성방환·오황균의 집이 있다. 모두 청주의 아파트에서 살다 염증을 느끼고 각자 개성대로 이 곳에 집을 지었다. 이들은 따로 따로인가 하면 같이 생활하고, 같이 있는가 하면 따로 따로 산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그림자만 봐도 한 잔 하자고 부르는 바람에 '피해'가 막심했는데 이제는 서로 사생활을 지켜준다고.

거실. 천장아래 벽화 역시 전 주인이 그린 것이다. 사진/육성준 기자

어쨌든 시인의 집은 이들의 집을 지나 아래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야 나온다.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은 둥그런 형태의 시원스런 통유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통유리로 바깥경치를 내다볼 수 있다. 거실에 서서 보면 앞을 가리는 건물이 없기 때문에 바로 산이 보인다. 아마 시인은 이 곳에 서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느낄 것이고, 그 느낌을 시로 쓸 것이다.

집 바깥으로는 아궁이를 설치하고 불을 땔 수 있게 해 놓았으나 이제는 안 쓴지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시인은 "구들이 너무 두꺼워 불을 땐지 7시간이 지나야 뜨거워진다. 불을 때고 자면 아침에 일어날 때쯤 뜨거워진다"며 껄껄 웃었다. 그래서 기름보일러를 때지만, 연료를 아끼기 위해 전기요를 쓴다고 했다. 시골에서는 추위를 견디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다. 거실에는 소박한 벽난로가 있으나 이를 쓰지 않고 주물로 만든 벽난로를 들여놓았다.

거실에는 찻상이 놓여있고 방금 읽다만 책들이 몇 권 있었다. 녹차를 즐겨마시는 그는 손님이 오면 손수 차를 끓인다. 사실 시인의 집에는 '귀찮을 정도로' 많은 손님들이 찾아온다. 그나마 연락을 하고 오는 사람들은 괜찮은 편이다. 평소 그는 “초면임에도 '팬'이라는 이유로 느닷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기자들 또한 불청객에 속한다. 싫다는 인터뷰를 억지로 하므로.

시인과 책, 그리고 자연
시인의 집은 방 2개에 거실, 화장실이 전부다. 대지는 마당이 넓어 990제곱미터나 되지만, 건평은 89.1제곱미터로 소박하다. 방 한 칸은 침실이고, 나머지 한 칸은 서재다. 책은 차고 넘쳐 거실 한 쪽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이 집에는 전 주인의 벽화가 있다. 현관문 입구에 있는 '구구산방'이라는 글씨 또한 이 사람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 대해 윤석위 시인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시인의 서재. 책으로 둘러싸인 이 곳에서 시인은 시를 쓰고 칼럼을 쓴다. 왼쪽 그림은 도 시인의 초상화. 사진/육성준 기자

전국구 시인이면서 전국구 강사인 도 시인은 정말 바쁘다. 전국에서 강연요청이 쇄도한다. 이 집에 들어와 5년동안 칩거하면서 건강을 회복하자 주변에서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거쳐 지금은 부회장으로 있고, 충북민예총 고문 역할도 맡고 있다. 지난해 교육감선거 때는 출마하라는 압박까지 받았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네팔로 도망쳤지만. 그래서 시인의 텃밭에 난 풀 뽑아주는 사람, 채소 심어주는 사람, 마당에 꽃 심어주는 사람, 반찬 가져다 주는 사람이 저절로 생겨났다. 모두 시인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시로 화답한다. 최근에 쓴 시 ‘소녀’. 소녀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소녀 칠월의 사과처럼 연둣빛으로 빛나는 익을 대로 익은 것 같은 그러나 아직도 수확기를 경험하지 않은 시장에 나가본 적 없는 아직 처음 자란 그 나무에 푸르게 매달려 대롱거리는 젖내음 같은 뽀얀 향기가 살에 남아 있으나 이미 칠월까지 와 버린 풋풋한 사과의 그녀 배중률을 부정하는 그녀/ 여자이면서 여자가 아직 아니라고 하는 밀물 썰물이면서 아직 바다가 아닌 어떻게든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콩콩거리는 언젠가는 가난한 어머니가 될 공무원도 되고 비정규직도 될 유모차를 끌기도 하고 마초를 만나 치를 떨기도 할 그러나 참으로 당찬 유쾌하고 발랄하고 맞장을 뜨자고 겁 없이 소리 지르기도 하다가 귀뚜라미를 보고 놀라 자빠지는 횃불보다 촛불이 잘 어울리는 달빛과 별빛을 좋아하면서도 햇살의 폭포를 거부하지 않는 경계에 서 있는 경계에 서서 양쪽으로 끌려가다가 경계를 중심으로 바꾸기도 하는 교복 속에 갇혀서 교복을 벗어나려는 몸들이 팽팽하게 전진해 나오는 저항을 한순간에 축제로 바꾸어 버리는 폭발하는 폭발하는 몸의 심지들" 시 ‘소녀’ 전문

“법주리 숲에서 새로운 기쁨 얻었지요”
도종환 시인이 자연을 노래하는 까닭은?

도종환 시인
굳이 도종환 시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만큼 유명인사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동안 신동엽창작상, 올해의 예술상, 거창평화인권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을 받았고 ‘세상을 밝게 만드는 100인’에 선정됐다. 또 한국작가회의 산하 젊은작가포럼에서 ‘아름다운 작가상’을 수상했다. 특히 그의 시 ‘담쟁이’는 한국경제신문 주최 2009년 ‘직장인 100만명이 뽑은 내 인생의 시 한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 ‘담쟁이’ 전문.

자연의 품에서 살기 때문일까. 도 시인은 구구산방으로 들어간 이래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많이 쓰고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시대에 저항하고 바른 말을 하는 역할을 정확하게 해내고 있다. 시인은 이 곳에서 많은 작품집을 냈다. 시집으로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해인으로 가는 길’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누가 더 놀랐을까’,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시 창작교실’ ‘나무야 안녕’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마음의 쉼표’ 등을 세상에 내놓았다.

“내 삶의 주체가 바뀌었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사람들은 시인의 글이 더 맑고 청아해졌다고 말한다. 도 시인과 이웃사촌인 윤석위 시인은 “도 시인이 시골에서 산 이후로 몸과 마음이 많이 건강해졌다. 그 만큼 작품도 좋아졌다. 전업작가로서 살고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다”고 말했다. 도 시인도 산방에서의 삶이 다소 외롭지만 훨씬 인간적이라는 말을 여러 작품에서 하고 있다.

그는 산문집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에서 “사막과 같은 도시에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일사불란한 지휘통제를 따라 한 손에는 경전,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든 채 잠시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수많은 계율과 법칙이 있고, 도처에 원수가 숨어 있습니다”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숲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어 함께 공존하는 일체감과 원융합일의 세계가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산방으로 들어갔을 때 몸은 온전치 못하고 마음의 균형을 잃어 밥벌이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 손수 밥을 지어야 했고 얼어죽지 않으려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녀야 하는 생활, 끼니를 세 끼에서 두 끼로 줄이고 반찬 가짓수를 하나씩 줄여가야 하는 생활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기쁨을 얻었다는 것. 그것은 검소하고 간결한 삶, 소박하게 사는 삶, 자본주의적인 욕망에 멱살을 잡혀 끌려 다니던 자아가 지워지고 작업복 바지 하나로도 편안한 새로운 자아가 나타나는 삶이라고 말했다. 시인은 “무엇보다 내 삶의 주체가 바뀌었다”며 시골생활에 대만족하고 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