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군특수범 여론왜곡, 북파공작원 보상법 적용 여론
실미전우회, 생존 기간병 출신 후유증 환자 보훈대상돼야

옥천지역 실종 청년 7명 가운데 5명이 훈련부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는등 실미도 684부대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또한 영화 ‘실미도’와 달리 훈련대원들은 사형수 무기수와 같은 범죄인 출신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7일 SBS는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을 통해 실미도 684부대의 실체를 상당부분 밝혀냈다. SBS 보도내용을 바탕으로 새롭게 드러난 실미도의 진실을 정리해본다.

●실미도 진실규명, 노력 있었다.
실미도 684부대의 정체와 68년 무장난동사건의 배경에 대해 심층보도한 매체는 월간 <신동아>였다. 지난 93년 5월 <신동아>는 부대 창설 멤버였던 김이태 훈련교관의 익명제보를 바탕으로 장문의 기사를 게재했다. 71년 무장난동사건으로 실미도의 젊은 영혼 31명이 모두 세상을 뜬 지 21년만의 일이었다. 김이태씨는 SBS인터뷰에서 “언제가는 이 엄청난 비밀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훈련중 죽임을 당한 대원들을 생각하면 우리같은 기간병들도 살인에 대한 책임이 뒤따르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공소시효(15년)가 지나면 모든 것을 밝히자고 맘먹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신동아> 보도는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고 단발성 기사로 끝을 맺었다.

이후 지난 99년 백동호씨가 대중소설로 집필한 단행본 ‘실미도’가 발간됐고 같은 해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에서 청주에 거주한 김방일 훈련교관 증언을 바탕으로 실미도를 집중조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강우석감독은 실미도 영화화에 대한 구상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리뷰>는 김방일씨의 방송출연 직전 지역 인사의 제보에 따라 김씨와 단독인터뷰를 갖게 됐다. 당시 김씨는 보관하고 있던 실미도 훈련막사 사진 등을 제공,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훈련대원 중 사형수 무기수 없었다
71년 무장난동 사건직후 생존 훈련대원 4명에 대한 수사를 맡았던 김중권 전 의원(당시 군검찰관)은 언론인터뷰를 통해 “실미도684부대원들에 대한 신상자료를 확인한 것이 사실이고 사형수나 무기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모두 민간인 신분이었고 군사법정에서 1심 사형선고를 받고도 아무도 항소를 하지 않아 뜻밖이었다. 이건 문제가 있다 싶어서 위에도 얘기를 했지만 군수뇌부는 빨리 덮고 넘어가자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듬해 3월에 곧장 사형집행이 됐다”고 말했다.

또한 군은 생존된 훈련대원들이 언론과 국회진상조사단에 노출되면서 실미도 비밀유지를 위해 전직 훈련교관을 내세워 이들을 회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군당국은 난동사건 발생직후 월남전에 참전중이던 전 훈련교관 김이태씨를 불러들여 이들을 설득했다. 김씨는 SBS인터뷰에서 “상부의 지시에 따라 실미도 비밀에 대해 생존 훈련대원들에게 입막음을 당부했다. 또한 재판이 끝나면 나와 함께 월남으로 가자고 설득해 2심을 포기시켰다”고 고백했다. 김씨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국가는 마지막까지 훈련대원들을 기만하고 인권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유족, 실종된 가족찾기 왜 힘들었나.
옥천 실종자 가족들의 경우, 자폭버스 승객에게 쪽지를 건넨 ‘옥천출신 박기수’의 이름이 한국일보 기사에 실린 사실을 알게 됐다. 따라서 한국일보 본사를 찾아가 해당 기자를 만났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그때 취재기자를 만났는데 ‘박기수’ 가족이라고 소개하니까, ‘그 기사가 나갈 수 없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큰 욕을 봤다. 군의 1급 비밀인데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느냐’며 말도 못붙이게 해서 아무런 확인도 못하고 그냥 내려왔다”고 말했다.

또한 가족들은 실종이후 공군 정보요원이 신원조회를 위해 집을 방문한 사실을 들어 군 정보당국에 신원확인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 결국 30여년의 세월이 흘러 부모세대는 숨져갔고 형제들만이 아련한 추억을 간직한 채 지내온 것이다.

●옥천지역 청년 집중차출한 배경은 무엇인가
남북 대치상황에서 북파공작원 양성을 위해 육해공 3군이 각각 특수부대를 운영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민간인 신분의 공작원 차출은 군 정보당국에 의해 이뤄졌고 일명 ‘물색조’ ‘포섭조’라고 불렸다. 684부대의 경우 중정에서 기획했지만 부대구성과 운영을 공군에 맡겨 공군 정보부대에서 공작원 물색에 나선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대전에 공군정보부대 지역파견대가 위치해 옥천 대전지역에서 훈련대원 차출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정보파견대가 위치한 서울 경기도 일대에서도 훈련대원 차출이 두드러져 군 정보요원들이 인근 지역에서 편의적으로 모집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옥천에서는 물색조가 실종 청년들을 대상으로 1개월 가량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집중포섭한 의혹이 짙다. 실종자 가족에 따르면 “대부분 어디로 가는지 말도 없이 사라졌고 나중에 같이 유혹받은 친구에게 전해들었다. 사복입고 권총가진 사람들이 ‘특수부대에 들어가서 정해진 임무만 수행하면 직장도 잡아주고 평생 먹고살 걱정없이 해준다’고 하면서 포섭했다는 것이다. 또 누구는 가족에게 ‘좋은 회사 취직하는데 일만 잘되면 매달 200만원씩 준다고 했으니 돈벌러 갔다오겠다’고 얘기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대전 정보부대원들이 시내지역에서 적임자를 물색하기 힘들다고 보고 인근 옥천 농촌지역에서 취업을 미끼로 순박한 청년들을 끌어들인 셈이다. 이밖에 훈련교관 김방일씨에 따르면 서어커스 곡마단, 구두닦이, 폭력배 잡범 등 사회 하층계급의 저학력 무연고 청년들을 집중포섭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미도 684부대 비극, 향후 대책은 무엇인가
옥천군과 옥천군의회는 지난 11일 옥천지역 실종 청년 7명의 가족들과 간담회를 갖고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실종자 가족들도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국방부 진상규명 진정접수에 이어 향후 훈련대원에 대한 명예회복 차원의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유가족 대책위원회는 국방부에서 명단을 공식확인한 5명에 대한 시신확인 요청을 한 상태다.

이에대해 국방부측은 “군사재판에 회부돼 72년 3월 사형집행한 훈련대원의 시신도 어디에 묻혀있는지 파악할 수 없는 상태다. 옥천 출신 훈련대원들의 시신은 훈련이나 난동사건 당시 숨졌을 것으로 추정할 뿐 아직 더 이상 확인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군교도소에서 사형집행후 684부대 창설을 주도한 중정에서 시신을 수습해 은밀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또한 난동사건 당시 숨진 20구에 달하는 시신도 중정 또는 군정부부대에 처리과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기록이 없다면 당시 근무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사실관계를 확인 할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훈련대원에 대한 신원과 684부대의 진상에 대해 밝혀질 경우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문제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에대해 지난해 12월 국회 국방위를 통과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률안’을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특수임무수행자’란 바로 ‘군번없는 군인’ 북파공작원들을 지칭한 말이다. 국방부는 한국전쟁 이후 북파공작원 사망자를 7800여명으로 추산했고 이는 월남전 희생자 5600명보다 많은 수치다. 684부대는 김신조 무장간첩단 사건의 보복을 위해 급조되면서 기존 HID와 같은 북파공작원 양성부대에 비해 반인권적, 불법적 요소가 다분했다. 이들에 대한 상응한 명예회복과 유가족들에 대한 응분의 보상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분단 대치상황에서 비극적으로 숨진 이들에 대한 신원이 없이 새로운 통일시대를 대비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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