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곡 하나에 세 편의 노래말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2007년 12월 14일 세워진 ‘채동선 음악당’은 벌교읍의 중심에 들어서 있다. 음악당 앞 길의 이름도 작곡가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채동선로’로 붙여져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의 작곡가 채동선(1901~1953)에 대한 사랑은 그의 이름을 붙인 음악당은 물론이고 인근의 오래된 채동선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음악당의 한 쪽은 읍사무소이며, 음악당 로비 아래 1층은 채동선 전시실이다.
중강당 규모의 음악당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아담하면서도 품격있게 만들어져 있다.

음악당 앞에는 ‘채동선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세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오른쪽엔 작곡가의 약력이 적혀있고 왼쪽에는 <고향>의 악보가 가사와 함께 새겨져 있다. <고향>은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충북 옥천 출신 정지용(1902-1950)의 시이다.

고향
정지용 작시 채동선 작곡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 악보아래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쓰여 있다.
정지용 시에 붙인 이 곡은 채동선 선생의 대표적인 가곡이다. 처음 정지용 시 ‘고향’에 붙여진 이 곡은 박화목 시 ‘망향’ 이은상 시 ‘그리워’ 등 세 편의 노래말이 있다.

▲ 채동선 음악당과 채동선 기념비
시대 상황을 반영한 <고향>

<고향>은 정지용이 1932년에 지은 것이다. <고향>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고향을 그리며 지은 <향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고향에 돌아와도 내 고향 같지가 않다’ ‘그리던 고향이 아니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정지용은 이 시를 1932년에 발표했는데,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신음하던 때다. 나라 잃은지 어언 20여년.

여기서 <고향>은 정지용의 고향인 옥천일 수도 있고, 잃어버린 조국 강산일 수도 있다. 고향의 산천은 예나 다름 없으나 마음은 먼 항구를 떠도는 구름처럼 방황하고 있다.

맨 마지막 연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라고 되어 있는데, 고향에 왔지만 그리던 고향이 아니어서 모든 것이 낯설고 멀게만 느껴진다는 뜻일 것이다.

9년 전인 1923년 휘문고보 졸업 직후인 이해 4월 그의 나이 21세때 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로 시작되는 <향수>(발표는 1927년 3월 ‘조선지광’ 65호)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이 듬뿍 들어있는 시였다. <향수>에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읊었던 그 고향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낯선 고향으로 다가온 것이다. 일제 치하의 조국 강토에 돌아와 어찌 허망한 느낌이 없었겠는가? 일본에서 유학 시절을 보내면서 깊은 민족적 자각이 생긴 결과일 수 있다고 본다.

지용은 1923년 5월에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東志社) 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휘문고보 측으로부터 학비를 보조받았다.

동갑인 김소월(1902~1934)도 같은 해 도쿄 상대에 입학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교류는 없었던 것 같다. 후일 역사에 남게 되는 두 시인이 당시 함께 일본에 있었던 것이다

정지용은 3년 후인 1926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4월에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27세때인 1929년 도시샤 대학을 졸업하고 이해 9월 모교인 휘문고보에 영어교사로 취임한다.
<고향>은 1932년 7월, <동방평론> 4호에 <조약돌> <기차> 등과 함께 발표한 시이다.

일본에서 채선엽이 처음 불러

▲ 작곡가 채동선
채동선은 정지용이 고향을 발표한 이듬해인 1933년 이 시에 곡을 붙여 도쿄에 유학 중이던 여동생인 소프라노 채선엽에게 보냈다. 미국에서 줄리어드 음악대학을 졸업한 소프라노 채선엽은 이해 도쿄에서 연 자신의 독창회에서 오빠가 보내온 이 곡을 처음 불러 조선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벌교의 부자집 아들이었던 채동선은 서울 제1고보(경기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운다. 그 뒤 1919년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 가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들어간다. 졸업하던 해인 1924년 바이올린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의 슈테른 쉔 음악학교에 들어가 바이올린과 작곡 등 서양전통 음악을 공부하고 5년 후 귀국한다. 그래서 그의 곡들에는 독일 색채의 선율과 화성이 특징이라는 분석이다.

1929년 귀국 후 채동선이 작곡한 가곡은 모두 12곡이다. 이 가운데 <고향> <향수> <압천> <산엣 색시 들녘 사내> <다른 하늘> <또 하나의 다른 태양> <바다> <풍랑몽> 등 8곡이 정지용의 시다.

1940년대에 접어들어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채동선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체의 외부활동을 중단한 채 농사꾼으로 변신한다. 일제에 대해 협력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국사람은 농촌을 알아야 한다며 새벽마다 밀짚 모자에 고무신을 신고 성북동 집에서 농장이 있는 수유리까지 10여리를 걸어 다니며 양과 닭을 키우고 튤립 등 고급화초와 관상묘목을 키우는 등 농사를 짓고 해질 무렵 귀가했다. 복장도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그 점은 정지용도 비슷했다.

▲ 옥천 정지용 문학관의 정지용 사진과 밀랍인형
채동선은 해방 후 고려 음악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한국 문필가 협회 부회장, 문교부 예술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서울 상대와 숙명 여대에서 음악이 아닌 독일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산 피난시절인 1953년 2월 2일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대학 병원에서 급성복막염으로 53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다. 부산에서 막노동 뿐 아니라 통조림을 팔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으로 보아 심한 고생을 한 듯하다.

전쟁이 끝난 후 부인 이소란 여사가 피난 갈 때 서울 성북동집 마당에 묻어둔 악보 등을 1963년에 찾아 내면서 작곡가 채동선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소란 여사는 악보를 찾아낸 후 <채동선 가곡집>을 출간 하고자 했으나 당시 월북작가로 낙인 찍인 정지용의 시로 된 가사는 쓸 수가 없었다.

채동선이 작곡한 가곡 12곡 중 8곡이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므로 난감했다. 그래서 채동선과 가깝게 지낸 이은상 시인에게 그 곡들에 붙일 새로운 가사를 부탁했다. 그래서 <고향>대신 <그리워>라는 가곡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고향>은 전쟁 전부터 워낙 유명한 가곡이어서 당시에 이미 박화목 시인이 1953년에 쓴 <망향>의 새 가사로 널리 불려지고 있었으나 유족들과 상의해 붙인 것은 아니었던가 보다. 어쨌던 그러한 연유로 한 곡에 세 편의 노래말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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