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퀴즈대회 3수생 민경갑 군의 중국답사기<上>

특집연재
청주의 고교생들이 단재 신채호의 궤적을 찾아 12월19일부터 엿새 동안 만주에서 베이징까지 중국대륙을 누볐다. 역사탐방에 참여한 학생들은 제15회 단재문화예술제전의 일환으로 열린 충청리뷰 주관 역사퀴즈대회 수상자 2명, 글짓기대회 수상자 2명 등 고교생 10명과 허원 서원대 교수(단장) 등 모두 20명이었다. 이 가운데 퀴즈대회 우승자인 이재홍 군의 글을 상·하로 나누어 게재한데 이어 글짓기대회 대상 수상자인 신희관 군의 글을 상·중·하 3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번호부터는 학생답사기 마지막 순서로 단재문화예술제전 추진위 추천으로 답사에 참가한 민경갑 군의 글을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민 경 갑 운호고 2

충청리뷰가 주관한 단재역사퀴즈대회에 중 3때부터 도전했으나 3번 모두 순위 안에는 들지 못했다. 지난해 참가한 대회에서 본선에 진출한 것이 최고의 성적. 그러나 이는 민 군이 자신의 꿈인 참 역사교사를 향해가는 과정이다. 도전은 이미 허망하지 않았으니 그는 단재문화예술제전 추진위의 추천으로 이번 답사에 참여했고, 그의 불타는 꿈에 기름이 부어졌다.

대한민국이 일제강점 아래 놓여있던 1936년 2월21일 새벽 4시. 독립투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악명 높았던 감옥 중 하나인 ‘뤼순감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일제와 맞서 싸운 위대한 ‘민족의 큰 스승’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위대한 스승의 성함은 ‘단재 신채호.’ 언론인, 역사학자, 문학인, 사상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면서 오로지 ‘민족과 국가의 독립’을 위해 죽는 그 순간까지 일제와의 끝없는 ‘투쟁의 길’을 걸어오신 분께서 해방된 조국이 아닌 이국의 차디찬 감방의 시멘트 바닥에서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신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저항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우리 역사 속의 영웅들인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장군의 위인전을 쓰셨고, 만주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의 유적들을 육측으로 측정하시며 고구려와 발해, 나아가 고조선의 역사까지 한민족의 고대사를 연구하셨다. ‘무장투쟁론’을 주장하시던 ‘아나키스트’이자 글 하나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신 선생께서는 항일운동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이자 사상가이셨지만 삶은 늘 고난의 연속이었다.

▲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던 감방. 안 의사의 의거는 국제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대우도 남달랐지만 결국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박사가 거론되자 단재께서는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그를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다”라면서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셨다. 그래서 임시정부를 탈퇴하신 뒤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판하는 ‘신대한’이라는 신문을 만드셨으나 임시정부 추종자들의 방해 공작을 받으셨다.

이 때 생긴 이승만과의 악연은 단재께서 돌아가신 뒤인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까지 이어졌는데, 반공을 내세운 이승만정부가 단재의 고대사 연구 관련 자료와 저서들은 단재가 생전에 ‘무정부주의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보는 것조차 금지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 운동을 위한 망명길에 오른 대부분의 독립투사들이 국적을 회복한 상황 속에서도 단재 선생님의 국적은 2009년에서야 겨우 회복될 수 있었다.

이것보다 더욱 더 심한 것은 단재의 숭고한 정신이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의 수모는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 단재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자…’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가는 단재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고 선생의 정신을 잇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가 바로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이다.

‘단재문화예술제전’의 식전 행사이자 최근 4회째인 ‘단재역사퀴즈대회’에 3번째로 참가한 나에게 있어서 단재는 더 이상 역사책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평소에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이자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는 역사 교사를 꿈꿔온 나에게 있어서 단재 선생님은 가장 존경하는 사학자들 중 한 분이셨다.

처음으로 참가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무렵, 그러나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다음해에도 도전했으나 역시나 탈락. 그리고 어느덧 3회째 참가라 생각하니 ‘이번에도 떨어질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본선, 아니, 결선까지 가자’라는 생각을 하며 대회에 참가했다.

약 400여명의 인원 속에서 본선 진출자 100명을 OX퀴즈 형식으로 선발하는 예선전에서 우연히 만난 청석고 역사동아리 친구들과 합심(?)하여 본선을 통과하고 본선에서도 대체로 아는 문제가 출제되어 막힘없이 잘 나가던 도중, ‘조선혁명선언’과 관련된 문제에서 결선의 문턱을 앞두고 아쉽게 떨어지고 말았다. 올해에 거둔 수확은 ‘본선에 진출한 것 뿐이구나’라는 생각을 뒤로한 채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어느 날, 윤리 선생님의 추천으로 ‘청소년과 함께하는 단재해외유적답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 고문실. 당시 사용된 ‘형벌도구’가 그대로 전시되고 있어 왠지 모르게 무서웠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난생처음으로 가는 해외여행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에 놀라기도 했지만 책에서나 보던 단재 선생님의 발자취와 고구려의 유적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어 제대로 잠도 안 올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흥분되는 마음을 접어두고 기말이 끝나고 난 12월19일 새벽 5시. 함께 가는 친구들과 형, 누나들. 그리고 우리 일행을 이끌어주실 서원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님이시자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공동 대표이신 ‘허 원’ 교수님과 함께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해외유적답사를 떠났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약 1시간을 날아간 끝에 우리 일행이 도착한 곳은 ‘다렌’이었다. 그 곳에서 만난 첫 번째 가이드인 ‘주용’ 형님은 여행을 다녀온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개그맨 이수근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와 특유의 ‘ㄹ’자 발음은 주용 형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 포인트’였다. 그렇게 주용 형과 함께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인 ‘뤼순감옥’을 향해 출발했다.

1880년대 청 왕조가 북쪽 해안에 포대를 건설하면서 작은 어촌에서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한 다렌시는 청일전쟁 이후 1898년, 삼국 간섭의 대상으로서 관동주(다렌, 뤼순 등)를 조차한 러시아가 동청철도의 종착역을 마련해 ‘다리니(멀다는 뜻의 러시아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뤼순에 주둔 중인 함대와 요새에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파리’를 모델로 삼은 항구 도시로 성장한 다렌 내에서는 러시아의 행위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관동주 곳곳에서 러시아인을 몰아내자는 중국인들의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고, 이들을 제압하고 자신들의 지배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1902년, 러시아는 뤼순에 형무소를 건설하고 중국인들을 가두기 시작한다.

이것이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형무소 중 하나인 ‘뤼순감옥’의 시작이었다. 나중인 1907년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 군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한 이후, 뤼순감옥은 러시아가 처음 지은 규모에서 지금 형태와 규모로 확장되었다.

총면적 약 2만6000km, 275개의 다양한 감방, 2000여명의 죄수들을 수용할 수 있는 뤼순감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감옥의 영화 촬영팀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몰랐지만 영화 촬영장소에서의 관람은 자제하는 것으로 합의를 거친 후에 드디어 악명 높은 형무소의 안으로 들어 설 수 있었다.

▲ 통 안에 구겨 넣어 암매장한 현장을 재현했다. 안에 들어있는 해골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양측 벽면으로 붙어있는 감방이 달린 감옥의 내부로 들어서니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여기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그러다 얼마 뒤 나는 역사적인 한 장소 앞에 도착했다. 바로 1909년 10월16일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께서 수감되셨던 감방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감방과는 그 모습이 달랐다. 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안 의사께서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사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간수실’ 옆에 따로 감방을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이 안에서 자신의 자서전과 자신의 거사 이유를 적은 그 유명한 ‘동양평화론’, 그리고 무려 100여편 이상의 서예작품을 남기셨다니 새삼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재판에 참석한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구성된 법원에서 일제의 만행에 의해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하시고 ‘사형’이 결정되어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신 의사의 태도에 일본인들마저도 경외감을 금치 못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더욱 그런 심정이 들었다. 그렇게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신 안 의사의 감방 앞에서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묵념’을 마치고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치가 떨리는 일제의 만행

이동하면서 당시에 사용된 전화와 형벌도구,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모시는 제단, 심지어 ‘고문실’도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장소는 역시 ‘사형집행실’ 이었다. 들어서기 전부터 가장 심한 위압감을 뿜어대는 사형집행실 앞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용기를 내서 들어가 보았다.

답사를 오기 전에 동아리 활동 시간에 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나온 사형집행실의 모습과 유사한 모습의 교수대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낡고 부서져 가는 커다란 나무통이 있었다. 잠시 설명을 듣기 위해 고개를 들어보니 교수대의 옆에 있는 유리상자 안에도 같은 통이 들어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안에 ‘내용물’이 있었다는 점이었는데, 나중에 그 내용물을 살펴보니 끔찍하게도 사람의 해골이 웅크린 자세로 흙먼지와 함께 들어있었다.

주용 형의 설명은 더욱 무시무시하고 잔인했다. 교수형이 집행된 사형수의 시신이 밧줄에 매달리면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나무 몽둥이로 시신을 마구 때린다. 시신을 나무통 안에 웅크린 자세로 넣기 위해서 시체가 뻣뻣하게 굳기 전에 미리 두들겨 패 시체를 ‘부드러운’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그런 심한 짓을 해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다음 내용은 더욱 잔인했다. 시체가 담긴 통을 죄수들을 동원하여 뒷산에 암매장을 한 것이다.

다행히도 안중근 의사는 그런 몹쓸 짓을 당하기 않고 미리 짜 맞추어진 관에 온전하게 안치되셨다고는 하지만 감옥 내부에 수감된 수많은 죄수들이 이런 운명을 겪어야했다는 생각을 하니 숙연해졌다. 사형집행실 다음으로 들어간 모형 전시관에서 본 사형집행 후 매장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감옥에 갇히면서 얼굴을 익혔을 죄수들이 한 사람은 사형 집행을 당한 시체로, 그리고 또 한사람은 그 시체가 들어있는 관을 묻기 위해 동원된 신세가 되어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일본인들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집행실의 모습부터 이곳까지 오면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샘솟았다.

그렇게 샘솟은 분노를 잠시 삭이고 마지막으로 간 곳은 중국과 한국의 단체들이 협력해서 만든 ‘항일운동 국제지사 기념관’이었다. 안중근 의사와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 선생님을 포함해 한국과 중국, 심지어는 영국과 미국, 러시아 등 아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전시되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거나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이들이었는데 일제에 대항한 사람들이 아시아 외에도 이렇게나 많았다니 놀라웠다. 이들을 알기 전까지는 여순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이 중국인이나 한국인뿐 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일 운동가 전시관에서 가장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한 두 명의 항일 운동가들의 사연은 충격적이었다. 한인 애국단 소속의 요원이었던 두 사람은 관동군 총사령관과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를 암살하기위해 폭탄 테러를 준비하던 도중 사전 발각되어 수감되었으나, 1945년 패망 직전의 상태에 놓인 일본군이 두 사람을 살해한 이야기는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 정도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 밖에 일제의 사악한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 수많은 장소에서 활약하시다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고결한 영혼을 지닌 수많은 국제지사 분들에 대한 묵념과 경외를 뒤로 한 채 우리 일행은 뤼순 감옥을 떠나 다음 목적지인 단동시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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