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사람 불과 1% 최고은씨 사건 남일같지 않다"
장철기 감독 "어렵지만 다음 생에도 연극하고 싶어"

故 최고은씨의 죽음과 전업 예술인들의 삶

지난 달 말 한 예술인이 숨졌다. 죽음은 1주일여가 지나 세상에 알려졌다. 그 예술인은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작가인 故 최고은씨. 고인의 나이 고작 32살이었다. 최씨의 죽음은 설을 앞두고 일어나 더 큰 안타까움을 남겼다. 고인은 2006년 제4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단편의 얼굴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경찰은 사망 원인으로 평소 최씨가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아 왔음에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 해 사망에 이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화업계 종사자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업계 전반적 상황이 비슷하다. 많은 예술인들은 서울의 상황보다 더 어려운 지역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청주시 금천동 동주민센터 근처 한 지하연습실에서 만난 장철기 극단 꼭두광대 감독은 지역 예술인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 해줬다.

장감독을 만난 날은 극단 꼭두광대가 연습실을 이전하는 날이었다. 이삿날답게 어지러이 널려진 짐들이 보였다. 예전 극단 연습실은 주성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장감독 지인의 배려로 이용료 없이 생활했지만 언제까지 신세를 질 수 없어 이전을 결심했다. 장철기감독은 “사람이 빛을 받으며 생활해야 하는데 지하로 들어왔다”며 멋쩍게 웃으며 “건물주인이 극단 사정을 이해해줘 싸게 들어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콘테이너박스와 여관방을 전전하기도 했던 예전에 비해 나아진 형편이다.

▲ 장철기 감독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연극생활을 행복해 했다. 장감독은 다음 생에도 연극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장감독은 故 최고은씨 죽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청소를 하던 다른 단원 또한 잠시 청소를 멈추고 장 대표를 바라봤다. “고인의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도 하루 생활을 걱정할 만큼 형편이 힘들다”며 “지역 예술가들 대부분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그래도 장감독은 운이 좋은 편이라는 말을 한다. 부모 도움으로 작은 생활공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울릉도를 비롯한 전국을 공연으로 누볐고 해외 10개국에도 나가 극단을 알렸다. “만약 평범한 직장을 다녔다면 이런 일이 불가능 했을 것”이라며 웃어보였다.

극단 꼭두광대는 지난 해 문화관광부가 주최하고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과 국립국악원이 주관한 2010 전통연희 상설공연 폐막식에서 '우주이야기'로 창작연희우수상을 수상했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극단 중에서는 유일한 수상이었다. 부상으로 올해 전통연희 상설공연 초청과 해외공연 추천 혜택이 주어진다. 그럼에도 극단 재정상황은 좋지 않다. “지난 해 단원들 월급을 제대로 챙겨준 적이 없다”며 미안해했다.

어려운 사정에도 장 대표는 계속 연극의 길을 가겠다고 했다. 다시 태어나도 연극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장 대표는 “예술이라는 게 원래 자기만족이다”라며 말을 이어나갔다. “무대에 설 때는 주인공이 돼 왕 역할도 하지만 극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오기 마련”이라며 “때론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온다”고 했다. 그런 허무함을 느낄 새도 없이 단원들은 망치를 들고 무대해체 작업을 벌인다.

“얼마 전 오랫동안 함께 극단생활을 한 선배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겠다며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며 장감독은 다음 말을 가다듬었다. 다만 “공연이 잡히면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선배집을 방문해 감짝 놀랐다고 했다. 단칸방에 많은 옷가지가 정돈되지 않은 채 걸려 있고 휴대용 버너만이 방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감독은 “예술하는 사람들 가운데 명성을 얻고 성공하는 사람은 전체 종사자 중 1%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며 씁쓸해 했다.

박윤규 시인 “구조가 예술인 잡아 먹는다”
송일상 조각가 “ 젊은 작가 위한 지원책 필요”

▲ 박윤규 시인(좌), 송일상 조각가(우)

박윤규 시인은 1999년에 청주로 내려왔다. 충주 월악산에 작업실을 내 평일에는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박 씨는 시인으로 등단해 동화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박 씨는 “자신은 지역 예술인의 어려움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전제했다. 박 씨는 故 최고은씨의 죽음을 접하고 “한나절 동안 일이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가슴 아픈 일이라는 말을 되뇌였다.

박 씨는 “예술가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대학후배들도 안정적 직업을 선호한다”며 주로 “홍보일이나 카피라이터·기자 직업을 선택한다”고 했다. 박 씨는 “예술을 산업구조 속에서 바라보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이는 “예술가를 잡아먹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예술가는 사회에 깊이 관여해야 하기에 생계활동도 예술활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박윤규 시인은 정부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예술가들이 몰라서 지원받을 기회를 놓치거나 절차가 너무 복잡해 포기하기도 한다”며 홍보부족과 서류의 간소화 필요성을 얘기했다. “예술인들은 예술에 매진할 수 있고 정부는 실사를 통해 능력이 있지만 경제적어려움을 겪는 예술가들을 지원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송일상 조각가 또한 지역 예술인이 처한 환경에 대해 입을 열었다. 송씨는 “젊은 시인들의 경우 전업작가로 살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송씨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문제가 아니며 가까운 일본작가들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작가들이 많다”는 말을 전한다.

서원대학교 미술교육과를 나온 송일상씨는 동기 중 유일하게 전업작가의 길을 가고 있다. 다른 동기들은 교직의 길을 걷는 경우 대부분이다. “젊을 때는 어려운 환경에도 예술가 정신으로 버틸수 있지만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면 포기하는 경우들이 많다”고 했다.

송일상씨 또한 젊었을 적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작품판매도 “IMF 경제 위기 이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다”고 했다. 송씨는 “경제가 활성화 돼 중산층들이 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송씨는 “어려운 환경이지만 젊은 작가들이 많이 등장해 신선한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고 있다며 “젊은 작가들이 일할 수 있는 창작스튜디오가 더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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