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가곡의 20%가 소월 시

▲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못 잊어> 역시 여러 작곡가가 곡을 붙였는데, 그 중 하대응의 곡이 비교적 많이 불려진다.

못 잊어
김소월 작시 하대응 작곡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나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라.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물론 이 시는 소월이 숙모(계희영)와의 그같은 대화 이후에 쓴 시는 아니다. <못 잊어>는 그 훨씬 이전의 작품이다. ‘자신과의 대화 내용이 <못 잊어>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숙모의 말은 소월이 ‘어떠한 것을 못 잊어하고 그리워하는’ 뭇 사람들의 정서를 시 속에 잘 표현해 놓았다는 뜻이라고 본다.

▲ 서울 행당동 소월공원에 있는 김소월의 흉상
소월은 세상 떠나던 해 가을, 살고 있던 구성에서 곽산 남산리 고향에 돌아와 조상들의 묘에 성묘하면서 떼가 벗겨진 무덤에는 떼를 입히는 등 무덤을 일일이 다듬고 구성으로 돌아갔다. 전에는 추석 때도 선산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이때 자살을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날 장에서 생아편을 사가지고 왔다. 그날(1943년 12월 23일) 밤도 부인과 마주앉아 술을 따라 마시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술에 취한 색시는 세상 모르고 곯아 떨어졌다. 잠결에 남편인 소월이 무엇인가를 입에 집어 넣어 주기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소월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고 소월의 처는 그 당시의 상황을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기른 소월>

소녀와의 사랑은 사실 무근

소월이 어느 소녀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소월이 사랑했던 소녀라며 오숙 이야기가 가끔 나오는데, 숙모는 말이 안 되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펄쩍 뛴다.

<내가 기른 소월>에 따르면, “소월을 두고 난데없이 여자 친구가 있었던 것처럼 꾸며서 글을 쓰는데, 문제의 여인 오숙에 대해서 기록한다면 다음과 같다.

큰집(소월의 집)에서 곽산골에 가려면 ‘회대미 재’라고 불리는 조금 언덕진 곳에 집 한 채가 있었다. 그집에는 윤 과부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 과부의 딸과 사위 오정준이 다른 지방에서 살다가 윤 과부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게 되었다. 딸 내외에게는 오철, 오숙이라는 외자 돌림의 딸 둘이 있었는데 내가 시집갔을 때 철은 열넷이었고, 숙은 열한 살이었다. 그리고 소월은 네 살(한국나이)이었다.

소월이가 오숙을 사랑해서 남산봉에서 자주 밀회한 것 같이 글로 묘사를 했는데, 네 살짜리하고 열한 살짜리 소녀가 그 시대에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을까 독자의 상상에 맡기지만 이렇게 터무니 없고 사실무근한 일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소월의 인상을 흐리게 하고 욕되게 하고 있으니 소월을 기른 나로서 이해할 수가 없어 분명히 밝혀둔다.”

▲ 소월이 다녔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북한 <문학신문> 기사도 이를 뒷받침 한다. 1966년 김영희 기자가 소월의 고향에 취재를 갔을 때 오숙의 언니 오철씨를 만나 물어보았다. 오철 할머니의 이름은 오철청으로 바뀌어 있었다.

김영희 기자는, 사람들이 소월의 소꿉친구인 오숙이 소월 시인의 첫 연인이며 후에 오숙의 죽음을 슬퍼하여 소월이 ‘초혼’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어 오철씨에게 소월과 동생 오숙과의 관계를 물어봤다고 했다.

오철 할머니는, “ 이 사람아, 우리 오숙이가 나보다 두 살 아래였는데 그때 열 살이 되나마나했지. 그리고 오숙이는 정식이(소월의 본명)가 죽기 전에 죽은 게 아니라 전쟁 때 미국놈 폭격에 죽었네.”

김영희 기자는 이어서 이렇게 썼다. “이 증언은 ‘초혼’을 한낱 연정시로 돌려버리려는 부르주아 문인들의 말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증명해 준다. ‘초혼’은 잃은 조국을 목타게 부른 애국시인 것이다.”

김영희 기자가 만약에 소월의 숙모 계희영씨를 만났다면 기사를 어떻게 썼을까? <초혼>이 애국시일 수도 있지만, 숙모는 <초혼>이 소월이 15세 때 죽은 제일 가깝던 친구 김상섭을 위해 썼다고 했다. 한마디로 애국시로 단정한 것은 조금 성급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소월은 구성군에서 숨졌으나 묘소는 고향마을인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 진달래봉 중턱으로옮겨졌으며 묘소 앞 시비에는 그의 대표시 가운데 하나인 <초혼>이 새겨져 있다고 당시 <문학신문>은 전했다.

북한에서는 이 기행문이 실렸던 1966년까지만 해도 ‘민족시인’, ‘애국시인’이라며 소월을 꽤 대접했지만, 이듬해부터는 소월을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행문이 실린 이듬해인 1967년부터 북한이 주체사상 강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소월의 작품은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 등의 사상·저서와 함께 봉건·유교 사상으로 낙인찍혀 묘 앞의 시비가 뽑히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 1925년에 나온 시집 ‘진달래꽃’ 원본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이 시기에 김소월은 ‘패배적 감상주의에 젖어 현실을 극복할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사상적인 제약성을 가진 작가’로 평가절하되었다. 그렇게 오래 푸대접을 받다가 1992년에야 복권되기에 이른다.

소월은 뒷산에 뜬 달

북한의 ‘문학신문’에는 또 소월이라는 아호(雅號)도 스승 김억이 지어준 것이 아니라 소월 스스로가 고향 마을 뒷 산인 ‘소산(素山)에 뜬 달’이란 의미로 지은 것이란 내용도 실려있다.

소(素)자는 ‘희다’ ‘소박하다’는 뜻으로 소산은 이 동네 남산봉(진달래봉)의 옛 이름이다. 북한 기자가 취재를 갔을 때 남단동 촌로들은 소월은 ‘소산에 뜬 달’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김송하라는 노인을 만났는데, 남산봉을 옛날에는 소산이라고 불렀고, 어느 해인가 소월이 송하노인에게 자기의 필명을 소월이라고 짓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고향땅에 뜬 달로서 언제나 그리운 향토를 지키겠다는 뜻이요, 나아가서는 내 나라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이 신문은 기록했다.

한편 소월의 시로 된 노래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현재 진행형이다. 과거에 전체 가곡의 20% 정도가 김소월의 시로 만들어진 것이란 통계가 있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월의 시가 가곡이든 가요든 그토록 많이 가사로 채택되고 있는 이유는, 소월 시의 민요적 율조도 중요한 이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의 시가 민중의 애환과 보편적 정서를 쉬운 우리말로 간결하게 표현함으로써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