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빌 공(空)자 공약’이다. 정치인들이 하도 말 뒤집기를 하다 보니 공약(公約)이 허공에 뜬 공약(空約)이 돼버렸단 얘기다. 누가 처음 이 표현을 썼는지 찬사를 보내고도 싶지만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공약(空約)이 이미 참신성을 상실한 시쳇말이기 때문이다.

시쳇말의 시체라는 단어는 죽은 사람을 뜻하는 시체(屍體)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시대의 유행과 풍습을 의미하는 시체(時體)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요사이 두루 유행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시쳇말이 된 공약(空約)이란 표현을 자꾸 입에 담게 만든다. 대선 당시 충청권 공약이었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이하 과학벨트) 입지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겠다는 이른바 ‘백지화 발언’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1일 방송3사를 동원한 간담회에서 “국무총리가 위원회를 발족하고 그 위원회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토론하고 그 이후에 결정될 것이다. 그것이 충청도민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또 “백년대계이니 과학자들이 모여서 과학자들이 하는 것이 맞다”면서 백지상태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냐는 패널의 질문에는 “그렇다. 그게 맞다. 그러면 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빨간 거짓말도 일본식 시쳇말

이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과학벨트 충청권 유치는) 공약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라고 발언했지만 곧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이 났다. 서점에서까지 판매된 공약집 충청권 과학벨트 공약이 버젓이 나와 있는 까닭이다.
명문화된 약속마저 시체(屍體)로 만드는 대통령 앞에 사실 ‘빌 공자 공약’이라는 시쳇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다. 이래저래 자괴감을 안고 이 시쳇말을 쓴다.

대전시장 출신의 박성효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현 상황에 대해 “점심약속에 늦거나 못 지킬 때 상당한 이유와 미안함을 표시하는데 대통령 말씀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를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충청권의 민심”이라고 말했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표를 얻기 위한 발언이었기 때문에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라면 2007년 대선도 없던 일로 해야 되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하릴없이 시쳇말을 되뇌는 기자의 입에 견주어 정치인의 입은 자유롭다. 공인임을 망각한 새빨간 거짓말까지도. 그런데 ‘새빨간 거짓말’마저도 ‘적나라하다’는 일본식 한자표현에서 유래한 시쳇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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