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내가 괴로워하는 조선이여
소월이 조만식 선생을 회상하며 쓴 <제이·엠·에스>는 자살하기 4달 전인 1934년 8월 <삼천리>에 실린 것으로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쓴 몇 편의 시 중 하나다. 나라 잃은 설움이 깊어지면서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던 오산학교 시절의 교장 조만식 선생이 그리웠으리라.

평양서 나신 인격의 그당신님 제이, 엠, 에스.
德(덕)없는 나를 미워하시고
才操(재조)있든 나를 사랑하셨다.
(중략)
얽은 얼굴에 자그마한 키와 여윈 몸매는
달은 쇠끝 같은 지조가 튀어날 듯
타듯 하는 눈동자만이 유난히 빛나셨다.
민족을 위하여는 더도 모르시는 열정의 그 님
(후략)

유고시(遺稿詩) <마음의 고향>을 보면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짙어진다.

내 마음에서 눈물이 난다.
뒷산에 푸르른 미루나무 잎들이 알지
(중략)
건너집 갓난이도 날 보고 싶을테지.
나도 보고 싶다. 너희들이 어떻게 자라는 것을.
나 하고 싶은 노릇 나 하게 하여 주소.
못 잊혀 그리운 너의 품속이여!
못 잊히고, 못 잊혀 그립길래 내가 괴로워 하는 조선이여.
(후략)

그러므로 소월을 단순히 여성적인 감성의 민요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그의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은 깊었다. 시집 <진달래꽃>에 실렸던 초기시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도 조국강토를 잃은 아픈 마음을 담은 시다.

▲ 소월의 숙모 계희영 씨
그가 시를 통해 그리워한 님은 쉽게 추측하듯이 연정을 품었던 어떤 여인이 아니라 잃어버린 조국이라는 것이다. 소월은 14세 때 구성군 평지동에 살던 세 살위의 홍단실과 결혼했다. 소월의 숙모 계희영씨는 <내가 기른 소월>에서 “그의 시에 나오는 대명사 ‘사람’ ‘님’은 때로는 나라를 의미했고 때로는 소월의 색시를 뜻했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온 세계 여성을 상징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소월, 일본 경찰 조사 받은 뒤 ‘자살’ 언급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은 1966년 5월 10일부터 7월 2일까지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소월의 시와 생애를 재조명한 기사를 12회에 걸쳐 실었다. 이 신문의 김영희 기자가 소월의 고향인 정주 곽산 현지 취재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기사화 했다. 여기에 ‘소월이 자살한 이유가 일본 경찰의 핍박 때문이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국내에서는 <월간중앙>이 1998년 12월호에서 이 기사를 처음 다뤘다.

다음은 <문학신문>의 기사 내용이다.

1934년 (소월은) 구성군 경찰서의 호출을 받았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시인은 이런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참 이런 수모를 다 겪으면서 살아 무엇해. 차라리 죽는게 낫지. 그렇지 않으면 만주로 가야겠는데. 여보, 당신은 아들을 데리고 살겠소?”

다음날 아침이었다. 부인 홍단실은 의외의 변고에 억장이 막혔다. 시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미 숨을 거둔 것이었다. 부인은 시인의 베개 밑에서 흰 종이 봉지를 발견하였다. 그날 밤 시인은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 내가기른소월(계희영 저,1969) 표지
소월이 오산학교 3학년에 다닐 때 벌어진 3.1 만세운동 당시 학생들 중 지도급 위치에 있었으며 한때 도피생활도 했다는 이야기도 여기에 실려있다.

소월의 죽음과 관련한 숙모 계희영씨의 증언은 더 구체적이다.
계희영은 <내가 기른 소월> 머리말에서, “그의 중심의(속 마음을 담은) 시는 모두 왜경(倭警)에게 압수되어 불태워졌다. 지금 남아있는 시는 그 당시에 사상적으로 무흠하다고 인정받고 통과시켜 준 이른바 순정의 시다”라고 했다.

이 책에 따르면, 소월이 관동대지진으로 유학을 중단하고 고향에 돌아온 후부터 그는 일본 유학까지 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서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혹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다. 늘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심심하면 호출해서 소월을 설득시켜 자기 편에 서서 일해 주기를 바랐다.

어느 날 경찰의 호출장을 받고 갔다온 후, 숙모가
“그래 무어라든?”하고 묻자,
“별말도 없이 괜히 오라 가라 하지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아도 나라없는 죄로 아무말이나 다 못하고 돌아 오려니까 마음이 아파요.”라고 소월은 말했다.

일경, 소월 詩 불태우기도
1930년 가을 곽산에서 치러진 숙모의 맏딸 결혼식을 끝내고 숙모와 오랜만에 마주 앉았을 때 소월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숙모도 같이 울었다.

소월이 남산리에서 구성으로 이사갈 때는 원래 목적이 산골에 파묻혀 조용히 글이나 쓰며 경찰의 간섭을 피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순사가 찾아와서 “왜 직업이 없는가? 글을 쓰면 발표하라”고 말하면, 소월이 “발표할만한 것이 못 되오”하였으나 순사는 소월이 글 쓴 작품을 모조리 가지고가서 일일이 심문을 하였으며 별로 책잡을만한 것이 못 되는 것도, “이렇게 합시다”하며 소월을 생각해주는 것처럼 불에 던져 태웠다.
이렇게 자기가 쓴 작품들이 불에 던져질 때 소월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팠으므로 쌓이고 쌓인 설움이 숙모를 보자 터져 버린 것이었다.

일본 경찰 감시 벗어나려 술 마셔
소월은 이날 숙모가 “왜 그렇게 술을 마시느냐?”고 묻자, “찾아오는 순사에게 술꾼으로 보이려고 온종일 술상하고 앉아있답니다”라고 말했다.
숙모는 “소월이 경찰에 불려 다니기가 싫어서 이렇게 술을 마시며 미친 놈처럼 살아오자니 무던히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라고 썼다.

숙모는 소월에게,
“곽산으로 다시 와서 살자꾸나”하고 말했다. 소월은,
“아니요. 이제 다시 오지는 못해요.”라고 대답했다.
“허지만 구성에서도 견디기 힘들지 않나?”
“나야 이젠 이렇게 살다 말지요.”
“살다 말다니?”
“무슨 소망이 있어야지요. 나는 죽는 길 밖에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

▲ 진달래꽃 시집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서울 정동)
소월은 그전부터 죽는다는 말을 곧잘 해 왔는데, 다시 그런 말을 하니 숙모는 슬그머니 겁이났다.
숙모가 “나는 그래도 곽산이 그리워서 이후에라도 곽산에 와서 살려고 하는데.” 라고 말하자, 소월은 “숙모님, 지금은 그렇겠지만 평양에서 잘 지내시게 되면 잊을 날이 있을거예요”라고 숙모에게 말했다. 숙모는 그 무렵 평양으로 이사가 살고 있었다.
숙모 계희영은 “그 때 나와의 대화 내용이 그의 시 <못잊어>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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