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김소월(金素月 1902~1934).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그는 불과 32세에 세상을 떠났다. 온갖 좌절속에서 스스로 세상을 등진 것이다. 소월은 불운한 시대를 살았다. 흔히 알려진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일본 경찰의 핍박 등 상황적 원인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천재 시인의 말로가 너무나 안타깝다. 그가 지은 시들, 우리가 알고 기억하는 아름다운 시들은 거의 그가 20세 전후에 지은 것들이다. 생각할수록 놀랍다.

소월의 정확한 생년월일이 1902년 8월 30일(음력)이니 가장 유명한 <진달래 꽃>도 그의 만 19세 때 작품인 것이다. <진달래꽃>은 1922년 7월 <개벽> 25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이 시를 가지고 11명의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이 가곡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이 가운데 김동진의 곡이 가장 널리 불린다.

진달래꽃
김소월 작시 김동진 작곡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윤곽이 비교적 뚜렸한 김소월의 유일한 사진(오산학교시절).
님을 보내는 체념의 노래인가, 아니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깊은 미련과 집념의 노래인가? 어쨌든 이 시는 여인의 노래이며 우리의 전통적인 이별의 정한(情恨)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는 데는 대체로 해석이 일치한다.

젊은 소월이 부드럽고도 섬세한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지어낸 이 <진달래꽃>은 발표한지 3년 후인 1925년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의 제목으로 붙여졌다. 소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소월의 시들은 <진달래꽃>처럼 여인의 입장에서 쓴 듯한 것들이 많다. 소월 자체가 원래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하지만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폐인이 되어있는 가운데 집안의 여러 여성들 틈에서 자라면서 듣고 본 우리나라 여인들의 고통과 설움도 소월이 그러한 시들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월이 우리 나이 3살 때인 1904년 일본인 철도 노동자들에게 맞아서 정신이상이 된 아버지는 그의 평생의 한이었다. 일본 식민지하에서의 모멸감, 민족적 울분 등 여러 시대적 요인 역시 소월을 더 폐쇄적으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진달래꽃>을 짓게 된 사연

<진달래꽃>의 경우는 이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소월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친어머니 이상으로 따르던 숙모(계희영)가 있었다. 숙모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영특한 어린 소월에게 옛날 이야기 등을 잘 해주었으며 소월이 커서는 종종 의논 상대가 되었다.

나중에 서울에서 살던 그 숙모가 80세에 <내가 기른 소월>(장문각, 1969)이라는 책을 한권 남겼다. 이 책에서 숙모는 진달래꽃에 이런 사연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진달래꽃 초판본(1925년) 속의 원본시(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소월에게 경삼이라는 외삼촌이 있었다. 9살 때 7년이나 연상의 처녀에게 장가를 갔다.
국내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유학을 갔는데, 일본 가서 삼사년을 공부하는 동안 부인은 남편없는 시집에서 열심히 일만 했다. 낮이면 농사를 짓고 밤이면 베를 짜서 달마다 학비를 보내주었다. 오로지 남편이 금의환향할 날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시집와서 온갖 고생을 하며 15년이 지나니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고 주름마저 생겨 새색시 티는 간데 없고 어느 새 촌 할머니가 되어 가는 듯 했다

마침내 남편은 귀국하여 신의주에 있는 모 고보에 교사로 취직이 되었다.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신의주로 오라는 기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늘일까 내일일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은 남편이 젊은 여인과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소월의 어머니는 동생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며 소문도 확인할겸 신의주로 갔다. 가보니 소문이 사실이었다.

누나가 “조강지처를 저버리면 못 쓴다”고 간곡히 타일렀으나 "그런 말씀 하시려거든 내 집에 다시는 오지 마세요”라며 귀담아 듣지 않았다.

소월의 어머니는 너무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뛰어 그 날 밤 동생의 집에서 자지 않고 남의 집으로 가 하룻밤을 지샌 후 돌아왔다. 그러나 차마 그 사실을 올케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시누이와 올케는 그저 두 손을 마주 잡고 울기만 했다.

외삼촌이 그렇게 본부인을 헌신짝 버리듯 저버렸지만, 외삼촌댁은 원망도 하지 않고 잠잠히 시집에서 전과 다름없이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면서 남편이 돌아서기만 기다렸다.
숙모 계희영씨는 그 책에서, 원망도 미움도 모르고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본부인(소월의 외숙모)의 마음이 너무나 고와서 소월이 시를 한편 썼는데, 그게 <진달래꽃>이었다고 했다. 소월의 외삼촌 경삼은 본부인을 버린 후 일년이 못 되어 죽었다고 한다.

▲ 서울 남산에 있는 소월 시비 (산유화)
스승 김억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

소월이 시인으로 문단에 들어서게 된 것은 오산학교 시절 시인 김억을 스승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김억은 소월의 자질을 알아보고 시작(詩作)을 지도했으며 그를 문단에 소개했다. <창조>의 동인의 한사람이었던 김억은 소월이 만 17세 때인 1920년 3월 <창조> 5호에 <낭인의 봄> 등 소월의 시 5편을 선보인다.

1919년 3.1 독립운동 후 민족운동의 온상으로 지목 받았던 오산학교가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교됨에 따라 졸업예정자였던 소월은 이해 졸업장을 받고 1922년 서울의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할 때까지 2년 이상 집에서 머물게 된다. 배재에 편입하던 그해 소월은 <개벽>을 통해 <진달래꽃>등 많은 시를 발표한다. 20세 전후였던 이 무렵이 소월의 시작(詩作)활동의 전성기였다.

스승 김억은 소월 사후인 1939년, 소월의 삶과 문학을 회고하는 ‘김소월의 행장’, ‘김소월의 추억’ 등 두 편의 글과 함께 소월이 남긴 시들을 정리하여 <소월시초>를 펴낸다. 사실 김억이 아니었으면 소월에 대한 제3자의 기록은 거의 없을 뻔했다. ‘김소월의 행장’에서 김억은 소월과 자신과의 인연과 <진달래꽃> 등 소월의 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남산학교를 나와서 미래의 시인이 평북 정주군 갈산면 오산학교 중학부에 들어갔을 때는 지금(‘김소월의 행장’을 쓴 해는 1935년)으로부터 19년전. 이 시인의 나이가 15세였습니다. 모든 학과 중에서는 작문을 제일 좋아하였고 어학이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시인이 비로소 시가(詩歌)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은 그 당시 선생이던 김안서의 영향에서외다. 학생이던 그가 시가에 대하여 여간만 열중치 아니하여 (여간 열중한 것이 아니어서) 이 시인의 시집 <진달래꽃>의 대부분의 시상(詩想)도 그때의 것으로, 다만 다른 것이 있다 하면 그것은 후년에 그가 시고(詩稿)를 수정하였을 뿐이외다.

어느 편으로 보던지 조숙하였습니다. 나이가 불과 17~8이라고 하면 아직도 세상을 모르고 덤빌 것이어늘 이 시인은 혼자 고요히 자기의 내면생활을 들여다 보면서 시작(詩作)에 해가 가고 날이 저무는 것을 모르고 삼매경에 지냈으니 조숙이라해도 대단한 조숙이외다.”

소월이 다녔던 오산학교는 민족주의자 이승훈(1864~1930)선생이 세운 학교였다. 설립자 이승훈 선생과 더불어 교장이었던 조만식(1883~1950, 독립운동가)선생도 소월에게 민족혼을 불어넣어준 스승이었다. 후에 김소월은 조만식 선생을 그리워하는 <제이 엠 에스>라는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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