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17세 소년이 작곡한 가곡
1930년대 말, 17세 소년이 멋진 가곡을 작곡해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많이 애창되고 있는 <가려나>이다. 당대의 유명 시인인 김억(호는 안서 1896-1950?)의 시 <가려나>에 곡을 붙인 그 소년은 당시 중앙중학교(5년제)를 그해 졸업한 나운영(1922~1993)이었다.

나운영은 1939년 동아일보의 신춘문예 작곡부문에 응모했다. 이것이 1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작곡부문의 심사위원장은 홍난파. 신춘문예에 작곡부문이 들어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려나> 시는 1924년 6월 30일자 <동아일보>에 최초로 실렸던 것인데 당시 김억은 ‘고사리’란 필명으로 이 시를 발표했다. 이후 <가려나>는 김억이 1925년에 펴낸 창작시집 <봄의 노래>에 실렸다. 여기 <<사진>>의 시는 <안서김억전집(岸曙金億全集, 한국문화사, 1987)>에 실려있는 것인데, 원본 형태 그대로이다. 즉 1980년대 지면에 옮겨 놓은 1920년대의 원본 시이다.

원본 시는 마치 고어체의 한글을 대하는 것 같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내용은 ‘가려나’ ‘뜨려나’등이 반복되는 것 외에는 노래 가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려는 것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심정, 그리고 젊은 날의 기쁨과 설움, 앞날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아름다운 시이다.

▲ 가려나 원본(당시의 한글 표기가 재미있다)

가려나
김안서 작사 나운영 작곡

끝없는 구름길 어디를 향하고
그대는 가려나 가려나
가없는 바다의 외로운 배처럼
어디로 뜨려나 뜨려나
사랑의 스물은 덧없이 흐르고
앞길은 멀어라 멀어라
기쁨은 빠르고 설움은 끝없어
맘만이 아파라
아파라 아파라 아파라

손기정의 올림픽 제패에 영향 받아

▲ 시인 김억
나운영은 국악을 각별히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있었다.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꼭 음악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중앙중학교 3학년이던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신문 호외를 읽고 나서부터 작곡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누구나 나라 없는 슬픔과 울분을 안고 살던 때였다.

나운영은 “나라는 없어도 개인이 우수하면 민족의 이름을 빛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음악을 통해서, 작곡을 통해서, 손기정 선수처럼 민족의 이름을 드러내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이 해에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가곡 <아! 가을인가>를 작곡했다. 김수향의 시에 곡을 붙인 이 가곡은 지금도 가을이면 자주 불려지는 노래이다. 이 노래도 김수향(본명은 윤복진, 1908~1991)이 월북작가였기 때문에 가사를 바꿔 불러야 하는 수난을 겪었다.

나운영은 1939년 3월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이 해 12월 동아일보 신춘현상문예 작곡부문에 <가려나>에 곡을 붙여 응모했다. 당선작은 12월 31일자 신문을 통해 발표되었다.

동아일보는 이듬해 1월 심사소감에서 다른 몇 사람의 작품을 평한 뒤 나운영의 <가려나>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선자인 나군의 작품은 역시 습작류에 속하기는 하지마는 그 수법이 예술적 가요곡에 가장 가까웠고 곡 전체의 균제(균형의 뜻)된 점에 있어서 일일지장(一日之長, 다른 것에 비해 조금 나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곡은 소품에 지나지 않지만 가장 많이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동아일보, 1940년 1월 26일)

▲ 작곡가 나운영
나운영의 당선 소감도 같이 실렸다.
“중학 2학년 때부터 음악(피아노와 작곡)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작년 봄에 중학을 졸업하고서야 비로소 여기 전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 동안 김성태 선생의 지도하에 작곡을 연구했으며 귀사 음악제에서도 큰 감동을 얻었습니다. 더구나 이번 작곡 현상은 조선에서 처음 보는 시험으로 많은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응모하기까지에는 은사 박태현 선생과 신남철 선생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금춘(今春)에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코저 준비 중이며 이 기회에 힘을 얻어 단연 작곡 전공의 길에 들어서고저 합니다. 이번에 안서 선생의 시를 택한 것은 저 같은 초보인이 가장 해석하기 평이한데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시를 더욱 연구해서 작곡에 정진하고 싶습니다.”

<가려나> 당선 후 유학의 꿈 이뤄
신춘문예 작곡 부문에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집안에서는 나운영이 음악가가 되려는데 대해 절대 반대였다.
“꼭 음악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어머님이 적극 반대를 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음악하는 사람을 ‘풍각쟁이’라고 천대하는 고루한 관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어머님은 아들이 풍각쟁이가 되는 것을 허락하실 수 없으셨던 거지요.”(월간 꿈나라, 1980년 11월 1일 발행)

국악을 좋아했고, 나운영이 다섯 살 때 우리나라 고전악기인 양금을 가르치기도 했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경제권을 갖고 있던 이는 형이었는데 형도 어머니의 허락 없이는 한 푼도 학비를 대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동아일보에 당선이 된 후 어머니를 비롯해 집안 어른들도 비로소 나운영의 음악적 재질을 인정하게 되어 마침내 동경 유학의 꿈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먼 발치에서만 존경해 왔던 홍난파 선생을 찾아갔다.
“공교롭게도 신춘문예심사위원장도 난파선생이었습니다. 그때가 타계하기 1년 전쯤이라 병색이 완연했어요. 서양음악을 모방하기에 앞서 우리나라 제 자신의 노래를 만들라고 거듭 강조하시더군요. 그 후 지금까지 그 말을 내 음악의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1992년 4월 19일)

나운영은 1943년 일본 제국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앨토 유경손과 결혼하던 1945년부터 중앙여자전문학교(현 중앙대), 서울대, 이화여대, 덕성여대, 연세대, 세종대, 전남대, 목원대 등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많은 가곡과 동요, 기악곡 등을 작곡했다.

가곡은 <가려나> <아! 가을인가>외에 잘 알려진 <달밤> <접동새> 등이 있으며, 동요로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으로 시작되는 <금강산> <구두발자국>등이 유명하다. 또한 많은 복음성가도 작곡했는데, 기독교인이면 모르는 이가 없는 시편 23편에 곡을 붙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6.25 때인 1950년 피난지 부산에서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3분만에 순식간에 만들었다. 보통 작곡을 한 후 여러 번 고치는데, 이 곡은 1점 1획도 고치지 않고 하나님이 불러주는 영감 그대로를 단숨에 작곡했다고 한다.

한편, 앞서 인용한 <경향신문>에 따르면, 안서 김억의 시 <가려나>는 실제로 김억과 한 문학소녀와의 열정적인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신학문에 심취했던 그는 19세 때부터 창작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30살 무렵인 1920년대 중반쯤 되던 해 어느 날 평남 진남포에 사는 한 문학 소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로부터 7년간 편지로 사연을 나누며 지속되었던 그녀와의 사랑은 안서의 시 곳곳에 깊은 흔적을 드리우고 있으며 <가려나>도 그 중 하나이다. 평안북도 곽산의 명문가 태생이었던 김억은 8세 때 8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을 했다.

<가려나>는 시 자체로는 유명하지 않았으나 10대 소년인 나운영의 작곡으로 널리 알려졌고, 안서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애송된 시가 되었다. 김소월의 스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김억은 불행하게도 6.25 때 피난을 못 가고 서울에 남았다가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김억은 숙청 대상이었다. 북에서 김억이 문학사적으로 정식 복권된 것은 1992년 김소월, 정지용, 신채호, 한용운 등과 함께였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