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장일남 선생이 남긴 글이나 한명희 선생의 회고 등으로 추측컨대, <기다리는 마음>은 창작물이라기 보다는 번역, 번안물 또는 재구성물이 틀림없는 것 같다. 작곡가 장일남이 연평도 시절 접했던 옛 우리말 시가(詩歌)를 원전으로 하여 훗날 김민부가 만든 가사이므로 그렇게 봐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김민부가 이 가사의 원전이 한시라고 했다는 한명희 선생의 전언으로 미루어 한시와 고어체 한글이 함께 적혀진 원전일 수도 있다. 고어체 한글이 제주도 방언이었다면 더 난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민부는 장일남이 가져 온 원전을 그 자리에서 가사로 척 풀어냈다는 것 아닌가.

어찌되었던, 이 노래의 가사가 김민부의 고유한 창작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엄연한 김민부의 작품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번역 또는 번안물 등도 작가의 예술혼이 담겨져 새롭게 태어난 또 하나의 창작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고교 때 두 차례 신춘문예 당선

김민부는 1941년 3월 14일 부산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병석(炳錫)이었다. 부산중학교에 들어가 이름을 민부(敏夫)로 바꿨다. 그는 성남초등학교 때 두차례 월반을 했고, 공동출제 중학입시에선 부산에서 최고점수를 받은 수재였다.

부산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56년 8월 시집 <항아리>를 펴낸데 이어, 1957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석류>로 입선했다. 연이어 고3 때인 1958년 1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균열>이 당선되어 문학적 재능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고2 때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던 <석류>는 후에 작곡가 장일남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 널리 불렸다.

▲ 김민부 시인의 고교시절 사진
석류
김민부 작시 장일남 작곡

불타오르는 정열에
앵도라진 입술로
남 몰래 숨겨온
말 못 할 그리움아
이제야 가슴 뻐개고
나를 보라 하더라
나를 보라 하더라

김민부는 그러나 고교시절 문학에 빠져 입시준비를 제대로 못한 탓에 서울상대 입시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다. 그리곤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간다. 이후 동국대 국문학과로 편입하여 1962년에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부산 MBC에서 스크립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유명한 장수 프로그램인 <자갈치 아지매>는 그가 제안하고 글을 쓴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그는 결혼 다음해인 1965년 서울로 진출해 방송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방송작가로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순수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불의의 화재, 자살인가 아닌가?

1972년 10월 27일. 토요일. 이날도 여느 토요일처럼 친구 황규정군과 만나 술을 한잔 할 예정이었다. 황규정은 그의 고교 동기생으로 서울에서 하숙도 같이 할 만큼 친한 친구였다. 그는 막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별일이 없으면 토요일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당시엔 돈벌이 하던 김민부가 주로 술값을 냈다.

이날 황규정은 약속장소에 늦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겨 약속장소에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김민부는 그를 두시간이나 기다리다가 오후 늦게 갈현동 집으로 들어갔다.

이후의 상황은 사람들마다 조금씩 이야기가 다르다. 이 무렵 김민부는 연말특집 방송원고 3000 매의 부담감 때문에 예민해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부인과 언쟁을 벌인 뒤 화가 나서 방문열쇠를 창밖으로 던져놓고 석유난로를 발로 걷어 차 화재가 났다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날 저녁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석유난로를 피우고 원고를 쓰다가 날린 폐지에 불이 붙어 사고가 난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후자는 그가 자살을 자주 이야기한 것은 맞지만 천성적으로는 낙천적이었으며 당시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 늘 자살이냐 단순 사고사냐 하는 의문이 따라다닌다.

이날 부인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안방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그의 온 몸에는 석유난로의 불길이 번져있었다. 엉겹결에 덥쳤지만 부인도 같이 화상을 입고 말았다. 두 사람은 적십자 병원으로 옮겨졌다. 김민부에게는 90% 화상의 진단이 내려졌다. 그는 이틀 후 숨졌다.
부인은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지만 생명은 건졌다.

▲ 극작가 한운사
김민부를 보내는 영결식에서 선배 방송작가 한운사(1923-2009) 선생은 조사(弔辭)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무슨 천재라고 이렇게 처참한 광경을 펼쳐 놓았는가! 이래야만 되었는가! 그래, 이 세상 가만히 보면 개똥같다.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야. 우리보다 한 발 앞서서 그것을 깨달은 그대! 그대는 그래서 천재인지 모르겠다. 잘 가라…”

김민부의 서라벌예대 동기인 이근배 시인은 그 자신이 꽤 명성있는 시인임에도 “문학계에도 계급이 있다면, 내가 일등병이라면 김민부는 사성장군같은 존재”라고 했다고 한다.

추모시집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에 실린 추모의 글에서도 이근배는 이렇게 썼다.
“대개 천재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은 민부에게는 덜 어울리고 그 뭐 신과 천재의 중간쯤? 아무튼 민부는 우리 시대에 섬광(閃光)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하나의 환영(幻影)같은 시인이다. 천재 시인들이 요절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신의 질투 때문이라고 한다. 참으로 버릇없이 신의 영역(?)을 침범한 민부를 신은 어김없이 일찍 데리고 갔다.“

한편, 약속장소에 가지 못한 황규정은 사고 소식을 듣고 참담했다. 자신이 약속을 지켰더라면 나지 않았을 사고였을지 모른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김민부가 가고 난 후 변호사가 된 황규정은 김민부의 딸 지숙에게 장학금도 대주고, 졸업 후엔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일하도록 했다. 친구와의 우정과 의리를 평생 지킨 것이다.

▲ 김민부 추모시집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 1995년
김민부의 죽음과 관련해 자살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있는가 하면, 조용필의 노래로 유명한 <창밖의 여자>가 김민부의 시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있다.

가요 <창밖의 여자> 작사자 논란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돌아서 눈 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이 <창밖의 여자>의 작사자가 김민부라는 주장이 한때 있었던 모양이다. 김민부의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한 박구하 시인이 쓴 <부산과 일출봉/시의 천기를 누설한 천재 시인 김민부> (시조월드 제9호, 2004 가을호)라는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김민부가 MBC에 드나들던) 당시 사장 비서실에 근무하던 배 모라는 여사원이 있었다. 그녀는 김민부의 글이 좋아 김민부를 따랐고 작가실에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김민부는 글을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겨서 던져버리기 일쑤였는데 그 폐지마저 일일이 주워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민부 사후 <창밖의 여자>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약 유명 작가로 데뷔하였다. 그런데 김민부의 미망인 이영수 여사가 우연히 이 책을 보고 그 내용이 자신이 생전에 남편의 원고를 타이핑 해 준 것과 글자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똑 같았으므로 이 소설이 김민부 작품임을 알고 추궁하였으나 완강히 부인하는 바람에 더 밝혀내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시 <창밖의 여자>는 뒤에 조용필이 곡을 붙여 노래하여 히트하였다. 곡은 히트하였으나 그 가사의 작사자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천재는 죽어서도 이렇게 논란거리를 남기는 모양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