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수돌 교수의 집...‘밥=똥, 똥=밥’ 순환형 삶이 무엇인가 보여주다
소박한 귀틀집과 부춛돌식 잿간 특별...온 가족이 함께 지은 집이라 소중

강수돌 교수는 자연에 순응하며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순환형 삶을 살고 있다. ‘자연이 최고의 교과서’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강 교수가 손으로 가리키는 게 퇴비를 만드는 거름통이다. 뒷간 바로 앞에 있다.

“오래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똥바가지입니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순환형 살림살이
구조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경제를 살리는 길입니다. 학생들에게 경영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주민
들을 이끌어야 하는 이장으로서 이 똥바가지야말로 나의 본분을 다하기 위한 지침서이자 소중한 보물
입니다.”

그런데 웬 똥바가지? 강수돌 고려대 세종캠퍼스 경영학과 교수 집에 가면 똥바가지를 들고 찍은 사진
과 이런 글이 붙어 있다. 그는 외부강연을 나가면 ‘밥=똥, 똥=밥’이라는 말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
의 삶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골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밥과 똥이 순환되는 순환형 삶을
살고 있다. 학생들에게도 돈 경영 대신 삶의 경영을 가르치는 강 교수의 지론은 ‘자연은 최고의 교
과서’라는 것이다.

실내는 황토흙집에 아무 것도 바르지 않아 그대로 흙이 드러난다. 더러 흙이나 벌레가 툭툭 떨어지기도 한다.

귀틀집에 반해 귀틀집을 짓다
강 교수의 집은 충남 조치원읍 연기군 신안1리에 있다. 충북과 경계지역에 있어 청주에서도 가까운
편이다. 상당공원에서 출발해 자동차로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는 지난 99년 9월에 시골로 이사
했다. 과천에서 ‘수도권 대탈출’을 꿈꾸다 청주로 이전한 뒤 고려대 세종캠퍼스 교수가 되면서 다
시 이 곳으로 이사했다. 학교 근처에 땅을 사고 어떤 집을 지을까 고심하던 중 그는 후배로부터 결정
적인 도움을 받는다.

“‘충북으로 귀농한 한 후배가 근처에 소박한 한옥이 있으니 와보라’는 말을 듣고 갔다가 한 눈에
반했다. 가느다란 통나무를 끼워 맞추듯 쌓아 올리고, 그 틈새엔 대나무나 졸대같은 것을 대고 진흙
·황토·볏짚을 버무려 벽체를 만든 귀틀집이었다. 흙이 습도조절을 잘하고 늘 비슷한 온도를 유지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비교적 따뜻하다. 나는 귀틀집 형식으로 짓되 지붕에는 돌기와를 올려
자연미를 더했다.”

황토흙집의 실내.

자신이 원하는 집을 짓기 위해 강 교수는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주관한 ‘흙집 짓기’ 프로그램에 참
여하고, 귀틀을 짜 올리거나 대들보로 쓰일 통나무를 구하러 전국을 다녔다. 아내와 세 자녀 등 온가
족이 집 짓는 일에 참여하며 즐거움을 나눈 그는 현재 시골생활에 더할나위없이 만족하고 있다. 대지
는 밭까지 합쳐 500평으로 상당히 넓지만, 집은 아담하고 단출하다. 처음부터 소박한 집을 원했기 때
문에 건평은 30평에 불과하다.

집을 짓기 전 그는 한눈에 반했던 귀틀집을 지은 대목을 찾아갔다. 거기서 요구한 것은 부모님과 부
부, 아이들까지 3대가 같이 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거실에 통유리가 있어야 하며 대
청마루 한 켠에 코굴(흙으로 만든 재래식 벽난로. 사람 코처럼 생겼다 해서 코굴이라 부른다)을 해달
라는 것이었다. 집을 짓는 과정도 집주인과 대목이 서로 상의하며 완성하는 민주적인 형태로 진행했
다.

강교수 집의 전경. ㄱ자형에 서고와 창고를 따로 지었다.

집은 'ㄱ자형'에 서고와 창고를 양쪽에 따로 지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황토흙집이라는 사실이 적나
라하게 드러났다. 흙벽에 아무 것도 바르지 않아 간혹 흙과 벌레가 툭툭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강
교수는 그걸 즐긴다고 했다. 내부도 정말 소박했다. 값나가 보이는 물건도 없었다. 거실 한 쪽은 마
루, 한 쪽은 주방이었다. 주방도 아담해 7명이 둘러 앉으니 꽉찼다.

신안리 고층아파트반대대책위원장
그는 2005년 5월~2010년 6월까지 5년 동안 신안1리 이장을 지냈다. 강 교수는 이 직함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여기저기 글을 기고할 때도 이장직함을 꼭 쓴다. 이장이 된 계기는 마을 앞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시작됐다. 행정도시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모 건설업체는 15층짜리 1120세대라는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이 때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던 주변 과수원의 복숭아꽃과 배꽃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강 교수는 자신이 아끼는 마을과 자연이 처절하게 망가지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없다며 건설회사와의 정면대응에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신안리 고층아파트반대 주민대책위원장’을 맡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주민들과 함께 기자회견, 피켓시위, 연기군수 항의방문, 연기군청과 국회 앞에서의 1인시위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 동원했다. 이후 그는 마을주민들의 추대로 이장이 된다.

강 교수와 주민들이 결사반대 했으나 막지 못한 고층아파트. 강 교수 집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이 아파트가 시야를 딱 가린다.

실제 이 아파트는 조용한 시골에 흉물스럽게 서 있었다. 강 교수 집 마당에서 정면으로 아래를 내다
보면 고층아파트가 시야를 가린다. 이 곳은 남으로는 고려대, 북으로는 홍익대 캠퍼스를 끼고 있는
대학촌 예정지였다. 마을주민들은 아파트 건설단계 때부터 거대한 자본과 이를 지원하는 행정기관과
싸웠으나 결국 아파트는 들어서고 말았다. 그 대신 아파트는 분양에 실패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대학
생들을 위한 원룸형식의 다세대 주택 몇 채와 식당, 슈퍼 등이 전부다. 이 동네에 왜 이런 고층아파
트가 필요한지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다.

강 교수는 “고층아파트 반대운동을 결산하면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니다. 아파트사업 자체는
막지 못했다. 그러나 건설은 중단됐다. 분양률이 2%에도 미치지 못해 인테리어 공사도 하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실수요 예측과 사업 타당성 검토에 실패하고, 내가 5년전에 진지하게 충고했던 경
고를 무시한 결과다” 고층아파트 반대운동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는 그의 저서 ‘나부터 마을혁명’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진짜 신안1리 마을주민이 됐다. 그는 이장으로서 마을 아이들을 위한 글쓰기
교실을 열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마을 요가교실, 골목축제, 마을 도서관 만들기 등을 실현했다. 골목
축제 때는 마을사람들과 즐겁고 흥겨운 잔치도 했다. 말 그대로 주민들속에 들어가 주민들과 함께 하
는 이장 노릇을 한 것이다. 강 교수는 “골목축제는 고층아파트 저지투쟁에서 상처받았던 주민들의
마음을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이었다”고 회고했다. 거대한 자본과 행정력 앞에서 무기력 할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은 나중에 소음이나 분진, 진동, 균열, 일조권, 조망권 같은 것과 싸우면서 이래 저래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 축제를 통해 이 상처를 조금씩 씼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철저히 자연에 순응하는 삶
신안1리 주민은 350가구 1000명 정도 된다. 시골마을치고는 인구가 많은 편이다. 강 교수 집에 간 날
마을 주민 두 분이 찾아오셨다. 두 분 다 할머니였는데 강 교수는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할머니들의
얘기를 다 들어준다. 김장한 얘기부터 개 키우는 얘기까지 웃어가면서 대화하는 게 딱 이장 같았다.
강 교수의 말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옆 사람들은 박장대소했다. 그는 세계화나 집권화에 대한 참된
대안은 지역화 또는 분권화라고 주장했다. “삶터와 일터를 기반으로 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일상화가
참된 대안의 기초”라는 것이다. 강 교수가 마을주민들과의 공동체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이
런 사고가 밑바탕이 됐을 것이다.

그는 시골생활이 좋은 이유가 사계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자연에 순응하고 사
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두었다. 순환형 살림살이를 하면서 땅을 존중하는 것에. 강 교수와 가족들이
농사짓는 밭에는 배추, 상추, 부추, 고추, 콩 등 각종 채소들이 자란다. 그는 퇴비와 아버지의 똥바
가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노동으로 유기농 채소를 만드는 과정을 책 ‘이장이 된 교수, 전원
일기를 쓰다’에 자세히 썼다. 또 큰 아들이 다니던 대안고등학교 학부모모임과 친하게 지내면서 메
주를 쑤는 과정도 재미있게 소개했다.

된장찌개와 김치찌개가 맛있었던 점심. 유기농으로 배추농사를 지어 담근 김치라 그런지 맛이 특별했다.

강 교수 집을 방문한 날은 지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평소 강 교수와 친분이 있는 몇
몇 사람들이 방문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점심시간이 되자 부인인 조경선 씨는 점심상을 차렸
다. 집에서 담은 된장으로 맛을 낸 된장찌개와 김장김치가 단연 돋보였다. 현미밥에 시골 반찬을 곁
들이니 여간 맛있는 게 아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재즈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공부중인 큰 아들
이 재즈피아노곡을 선사했다. 강 교수 부부는 대안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가지 않고 전문 연주
자의 길을 걷겠다는 아들을 존중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강 교수는 외부강연을 다니면서 유기농 교육을 강조한다. “교육에도 유기농 교육과 화학농 교육이
있다. 유기농 교육은 인간성, 다양성, 인격체를 지향하고 화학농 교육은 외형적 성취도, 경쟁력, 우
수한 노동력의 관점을 추구한다. 유기농 교육은 또 유기농법처럼 아이들의 내면이 성숙되어 가는 과
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늘 기자는 자연의 품 안에서 숨쉬고, 사고하고, 생활하는 그를 다시 발견
했다. 평소 초청강연회에 와서 한 얘기가 모두 사실이었다.

강수돌 교수는 누구?
'나부터 교육혁명’ ‘살림의 경제학’ 저자
강수돌 고려대 세종캠퍼스 경영학과 교수(50)는 서울대 경영학과 학사·석사를 마치고 독일 브레멘대
학에서 노사관계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연이 최고의 교과서’라는 믿음으로 시골생활
에 대만족하며 살고 있다. 세 아이도 모두 시골에서 키웠다. 그리고 충남 조치원읍 연기군 신안1리
이장을 5년 동안 역임했다. 아침마다 부춛돌 잿간에서 똥을 누며 ‘똥아, 잘 나와 고마워’라고 인사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삶·노동·자연 등의 문제와 관련해 전국적으로 강연을 다니는 전국구 교수다. 풍부한 유머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화제로 재미있는 강연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 2월에는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캐나다 토론토대학 교환교수로 간다. 저서로는 ‘나부터 교육혁명’ ‘지구를 구하는 경제책’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공저)’ ‘살림의 경제학’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일중독
벗어나기’ ‘나부터 마을혁명’ ‘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가 있고 번역서 ‘세계화의 덫
’이 있다.

그가 뒷간에 천착하는 이유는?
유기농 채소 가꾸기 위해 실외에 부춛돌식 뒷간 설치

일명 부춛돌식 뒷간. 볼일 보면서 바깥구경을 할 수 있도록 조그만 창을 냈고 뒤쪽에는 각종 농기구를 걸어놓았다.
강 교수는 특별한 화장실을 가지고 있다. 바로 뒷간이다. 실내에 화장실이 있지만, 실외에 강 교수
만의 화장실을 지었다. 뒷간은 텃밭을 유기농으로 가꾸기 위한 고심끝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명 부춛
돌식 뒷간이다. 그는 이를 위해 생태 뒷간에 관한 글이나 책을 찾아 읽었다고 한다.

“실내 화장실은 똥과 오줌이 뒤섞여 정화조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요강과 실외화장실을 만들었다. 요강은 페트병 목을 잘라 썼고, 화장실은 부춛돌식 뒷간을 지었다. 집 지을 때 자투리로 남았던 큼직한 나무토막을 부춛돌삼아 양쪽으로 놓고 사람이 걸터앉는다. 가운데 앞으로는 오줌받는 통을, 뒤로는 못쓰는 삽을 손잡이만 잘라 잘 받쳐 놓는다. 삽 위에는 왕겨와 재, 부엽토 같은 걸 올려 놓는다. 거기에 앉았을 때 정면 눈높이에 작은 창을 냈다. 볼일 보면서 바깥경치를 구경할 수 있도록.”

그래서 오줌은 오줌대로 통에 모으고, 똥은 뒷간 바로 앞에 만든 거름통 속에 넣는다. 거름통에는 이
외에도 쓰레기와 낙엽, 닭똥, 강아지 똥, 부엽토, 풀, 왕겨 따위를 넣어 퇴비로 만든다. 그러면 채소
는 화학비료가 아닌 이 퇴비를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된다’는 평소의
지론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김장김치가 맛있다고 하자 강 교수는 ‘특수성분
’이 들어갔기 때문이라며 파안대소했다.

그는 요강과 해우소가 있고, 거름간과 텃밭이 있으면 순환형 살림의 기본이 갖춰진 것이라며 똥바가
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기하게도 오줌이 잘 삭으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똥바가지로 오줌을
퍼도 암모니아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냥 곰삭은 듯 풋풋한 냄새만 난다. 이 게 자연의 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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