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생존설’의 진원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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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생존설’의 진원지가 있다
  • 권혁상 기자
  • 승인 2004.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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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실미도> 백동호씨, “21명만 서울난입, 생존자 직접 만났다”

71년 8월 23일 실미도 684부대원 무장난동 사건의 보도기사를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발견된다. 당일 오후 3시15분 대간첩대책본부는 ‘서울 침투를 시도한 무장공비 21명을 군경이 저지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불과 3시간20분 만인 오후 6시35분, 정래혁 국방부장관은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공군 관리하에 수용 중이던 특수범 23명이 무인도 격리수용에 불만을 품고 난동한 것’이라고 정정발표했다.

첫 번째 발표에서는 인원이 21명이었는데, 두 번째 발표 때는 23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신문들도 별다른 의심없이 23일자 신문에는 ‘무장공비 21명 서울에 출현’이란 제목으로 보도하다가 다음날인 24일에는 ‘군 특수범 24명 무장난동’으로 바뀌게 된다. 이 부분이 소설 ‘실미도’의 저자 백동호씨가 주장하는 ‘실미도 훈련부대원 생존설’의 근거가 된다. 백씨는 언론인터뷰에서 “내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청주교도소에 복역할 때 당시 684부대의 생존자를 직접 만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생존 정황에 대해서는 “사건 당시 24명의 훈련병 중 3명은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과 담판을 짓자’는 다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3명 중 1명은 실미도 현장에서 다수파에 의해 살해당했고, 다른 2명은 달아났는데, 내가 만난 사람이 바로 달아난 2명 중 1명”이라고 말했다.

백씨는 소설 ‘실미도’에 8월 24일자 ‘인천 또 괴한 수명 한밤중 민가 찾아’라는 제목의 <동아일보>기사를 인용하기도 했다. “23일 밤 11시 30분께 인천시 옥련동 494번지 김창섭씨(32) 집에 권총을 가진 괴한 수명이 들어와 김씨에게 ‘밥달라, 안주면 죽인다’고 위협했다. 군특수범과 같은 얼룩무늬 차림인 괴한들은 약 5분동안 김씨 집에 있다가 밥이 없다고 하자 그대로 나가버렸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김씨 집에 출동, 부근 일대를 수색하는 한편 김씨 집 출입을 일절 통제하고 있다” 사건 발생 지역이 실미도 무장탈주 대원들이 시외버스를 강탈한 인천인데다 야간통행금지와 대방동 자폭사건으로 치안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한밤중에 총기를 들고 나타났다는 것은 시시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자폭현장에서 살아남아 병원으로 후송된 김종철씨를 인터뷰한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탈취한 시외버스에 탄 대원은 24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김씨의 진술내용을 보면 “낮 12시에 부대에서 24명이 나와 인천 송도 부근에서 잠깐 해수욕을 하고 주안에서 버스를 탈취, 내가 직접 운전해 서울로 올라왔다”고 밝혔다. 생존 가능성에 대해 김방일씨는 “수류탄 자폭 사망자와 군경 총격에 의한 사망자 등 시신을 모두 확인했기 때문에 생존자가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이 사건은 극한적인 남북대치 상황하에서 ‘비극적 사건’으로 매몰돼 33년 동안 국가는 침묵을 지켰다. 사건 관련자들의 간헐적인 증언만 있었을 뿐이고 영화 ‘실미도’를 통해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사건으로 비화됐다. 따라서 정부는 부대원 선발과 부대해체논의 경위, 공작원자폭 및 생존자 사형집행 과정, 이들의 정확한 신원 및 유해처리 등 갖가지 의문점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당시 부대원들의 무장난동은 결코 미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숨진 부대원 31명 전원은 물론 이들에게 빼앗긴 무고한 인명 모두 냉전시대 안보우선논리의 피해자들임은 명백하다. 또한 사건직후 생존자 4명에 대한 재판을 진행한 군사법원의 재판기록이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됐을 가능성이 높아 사형선고를 받은 4명의 신원도 파악될 수 있다. 역사야 말로 소수를 일순간 속일 수는 있어도 다수를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진리를 정부 당국자은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회진상조사단장 김수한 전 의원 진술
김수한 전 국회의원은 71년 8월 684부대원 무장난동사건 당시 국회 진상조사단장으로 실미도 현지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사건 당일 난동 부대원들이 최후를 맞았던 ‘대방동 현장’에서 신민당 소속 지역구 의원으로서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김 전 의원은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33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사건의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히 기억난다. 하지만 영화는 실체적 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국회진상조사단은 당시 김두만 공군참모총장을 상대로 질의를 벌였지만 684부대에 대해 “보고받은 적도 없고 방문한 적도 없다”는 답변만 거듭했다. 공군정보부대(OSI)도 자신의 직할 부대임에도 684부대를 전혀 몰랐다고 발뺌했다는 것. 김 전의원은 “부대 편성때부터 근본이 아주 잘못돼 있었다. 부대원들은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사명감이나 책임감도 없었고 정신교육도 전혀 안돼 있어 처음부터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김 전의원은 OSI에서 사건 생존자를 심문한 결과 매월 5000원씩 받기로 돼 있던 월급을 못받은데 대한 원성이 사건의 주요 동기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방동 현장’ 진상도 영화와는 상당부분 다르다고 지적했다. 영화는 부대원들이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하는 것으로 설정됐지만 실제로는 영등포경찰서의 기동타격대가 대방동 로터리에서 이들을 조준사격하는 과정에서 실탄 한발이 수류탄에 맞아 연쇄 폭발을 일으켰고 이 바람에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했다는 게 김 전의장의 설명이다.

부대 창설경위와 관련해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군부의 충성경쟁과정에서 감정적·즉흥적으로 창설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김종필총재 “군에서 제안, 중정은 연관없다”
1968년 실미도 684부대 창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자민련 총재(초대 중앙정보

   
▲ 김종필 자민련 총재.
부장)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대설립은 군부에서 제안 주도했고 중앙정보부는 연관이 없다”고 중정 기획설을 부인했다. 김총재는 “나는 직접 관여하지 않아 정확한 진상은 모르나 나중에 보고받은 내용”이라고 전제한 뒤 “김신조 일당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평양침투조’를 만들자는 논의를 청와대·여권보다는 군에서 먼저 제안하고 주도했다.육·해·공 참모총장이 이구동성으로 합창했다.”고 했다.

또 “평양침투는 극도의 보안이 필요한 사항이라 비밀이 새지 않도록 일종의 위장책으로 공군이 창설과 훈련을 맡았으며 중앙정보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실미도 684부대 창설멤버였던 김방일씨 등은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 공작책 제1국장 이철희씨가 주도했고 부대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고 증언했다. 특히 이들과 함께 부대 창설직전 청와대로 불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격려를 직접 받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김종필 총재의 중정 무관설은 착오이거나 사실은폐로 볼 수밖에 없다.

김총재는 또 부대구성에 대해 “사형수,무기징역수 가운데 희망자를 뽑았지 강제로 차출하지는 않았다. 대신 평양행 거사에 성공하고 돌아오면 모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보상책이 제시됐다.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른 부대해체 결정이나 부대원 사살명령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김방일씨 등 실미전우회원들은 일부 전과자가 포함됐지만 가정형편이 불우한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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