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목, 그 전쟁의 흔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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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 그 전쟁의 흔적(2)
  • 충북인뉴스
  • 승인 2010.12.2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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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목비’와 ‘비목’은 함께 쓰는 단어
‘목비’가 왜 ‘비목’이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다. 2010년 11월 4일 덕소의 이미시 문화서원으로 한명희 선생을 찾아갔을 때 필자도 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한 선생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비목’은 ‘목비’의 다른 말이다. 노래의 제목으로 ‘비목’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 국어사전에도 ‘나무로 만든 비’란 뜻으로 ‘목비’와 ‘비목’을 함께 쓰고 있다.

언젠가 일본어로 번역된 <비목> 가사를 본 적이 있다. ‘비목’을 일본어로 ‘목비(木碑)’라고 번역해 놓았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중국 등 한자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목비’라고 하면 통한다. 그런데 흔히 쓰는대로 ‘목비’라고 했으면 한 선생 말씀처럼 노래 제목으로 맛이 좀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69년 ‘우리 가곡의 밤’에서 처음 선 보여
<비목>이 만들어진 것은 1968년, 공식음악회에서 처음 연주된 것은 1969년 5월 12일 이었다. 이날 서울 시민회관(현재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우리 가곡의 밤’에서였다.

라디오에서 20분짜리 ‘가곡의 언덕’이란 주간 프로그램에 이어 일일 프로그램으로 만든 15분짜리 프로그램 ‘가곡의 오솔길’은 오후 4시 45분부터 5시까지 15분간 생방송으로 진행됐는데 매일 수십통의 신청곡 엽서가 답지하는 등 청취자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 화천 비목공원의 ‘비목’상징물.
▲ 이미시 문화서원 입구의 녹슨 철모
특히 주부 계층의 호응이 대단했다. 한 피디는 이에 고무되어 우리 가곡만 가지고 대규모 음악회를 열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요와 팝송이 대세였던 당시로선 대규모 가곡 공연은 하나의 공상같은 무모한 생각이었으나 한 피디는 마침내 순수한국가곡음악회를 기획,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방송국내의 반응은 썰렁했다.

순수 우리 가곡만 가지고 대형 음악회를 개최한다는 데 대해 당시 방송국 간부들은 ‘밑질게 뻔한 짓을 왜 하느냐’며 힐난했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측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음악회는 대 성공을 거뒀다. A석 500원 B석 300원이던 입장권이 동이 나서 1000원 이상의 암표까지 돌았다. 그래도 입장을 못한 청중들이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대형 유리가 깨지는 소동도 빚어졌다.

이날 음악회에 대한 한명희 선생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프로그램은 먼저 오케스트라 박스에서 경쾌한 우리 가곡의 메들리가 울리면서 막이 올랐다. 서주격의 메들리는 ‘금강에 살으리랏다’와 ‘희망의 나라로’였다.

이어서 당대의 저명 성악가 8명이 차례로 등장하여 기존 곡 2곡에 신곡 1곡씩을 불렀다. 출연진은 테너에 이인범, 김호성, 바리톤에 오현명, 이인영, 소프라노에 박노경, 황영금, 앨토에 이정희, 이영애 같은 당대 최고의 황금멤버들이었다. 이 때 비목을 초연한 성악가는 소프라노 황영금 교수였다.

청중의 대부분은 3,40대의 주부계층이었다.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객석에서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청중들도 간간이 보였다. 아무튼 한국 최초의 한국 가곡만의 성공적 공연에 고무돼서인지 그후 우리 가곡만의 음악회는 한국일보에서 잠시 이어갔고, 다시 MBC에서 매년 연례 행사로 꽤 오랜 기간을 지속해 갔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이후 비목은 공전의 히트를 하며 널리 애창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부터 동아음악콩쿨의 지정곡이 되었고, 1970년대 후반 TBC 드라마 ‘결혼 행진곡’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대중적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비목의 사연을 소재로 무용공연, 연극공연이 있었고, 1979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됐다. 영화는 가곡 <비목>과 민통선에서 발견된 전사자의 유해를 소재로 만든 완전한 창작물이다. 고영남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이순재, 전양자씨가 주연을 했던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동파리는 민통선 북방 마을로 동파리 실향민들은 임진강 건너편에 있는 그들의 땅에 배를 타고 출입영농을 한다. 윤구(이순재)의 아들 창환과 손주 상필은 일하기가 힘들어 그 땅을 팔려고 한다. 이에 윤구는 상필을 질책하며 종중땅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이때 지난 전쟁의 용사 송대섭이 윤구와 만나게 되고 대섭은 동파리 전투의 상황를 이야기하며 유격군의 분전상을 설명해준다. 윤구는 전사한 둘째 아들인 창윤의 생각으로 흥분하고 백학산 계곡에 하나의 비목으로 남아있음을 확신한다. 사단의 허가를 받은 윤구는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비목을 찾는다. 마모된 비목 근처에서 옥지환을 발견하고 창윤의 비목임을 가족들은 확인한다.”

이 영화에는 1970년대 당시 임진강과 화석정(花石亭: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변에 있는 누각)이 배경으로 나온다. 2005년 7월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때 고영남 감독의 회고작 7편 중 하나로 상영되기도 했다. 영화 <비목>은 2010년 7월 보궐선거시 강원도 ‘태백, 정선, 영월, 평창’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배우 최종원씨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 이미시 문화서원에서 한명희 선생과 필자(2010.11.4)
전쟁의 상처를 건드려준 것이 히트의 이유
이 노래가 히트한 이유에 대해 한 선생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목은 노래가 좋아서 유행한 것이 아닙니다. 노래도 노래거니와 그 배경에 우리 민족 모두가 직간접으로 체험한 6.25 전쟁이라는 민족적 통한의 응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엄청난 상처를 살짝 건드려준 거죠. 그러니까 공감대가 생긴 거죠”

작사가 한명희 선생은 1939년 생으로 올해 71세. 아주 건강한 모습이셨다. 흔히 덕소로 알려져 있는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읍 도곡리 산기슭에 일찌감치 널찍하게 터를 잡았다. 이미시 문화서원이라는 돌 간판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이미시 문화서원은 작은 공원을 연상할 만한 곳이다. 37년전인 1973년, 아직 TBC 피디로 있을 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 들어와 고생고생 하며 살았다. 1975년 방송국을 사직하고 몇 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9년간 교수로 재임했던 서울시립대학에서는 2004년 정년퇴임했다.

한명희 선생은 6.25를 소재로 한 시, 노래, 문학 등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연구하는 6.25 문화단지를 만드는 것이 숙제라고 했다. 강원도 화천군에서 1996년부터 호국의 달인 매년 6월 개최하는 <비목문화제>는 한 선생이 화천군과 함께 시작한 행사이다.

한편, 장일남 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6.25 때 격전지 철원에서 전투경찰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한명희 피디가 만든 <비목>의 가사를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집에 돌아와 즉석에서 멜로디를 붙였다. <비목>의 폭발적인 인기로 이 노래가 실린 레코드가 수만장이 팔렸다. 장 선생은 이때 받은 인세로 처음으로 자가용을 구입했다고 한다.

장일남 선생은 우리 가곡과 클래식 보급에 누구보다 앞장 서 온 작곡가다. <원효대사> <춘향전> <불타는 탑> 등의 오페라를 만들어 미국, 일본, 프랑스 등에 나가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한때 명성을 날렸지만 그의 말년은 편안치 않았다. 2000년 한양대 음대 객원교수 시절 교수임용과 관련한 문제로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고, 1990년대 말부터 알츠하이머 병으로 미국과 한국을 드나들며 투병생활을 하다가 2006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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