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은 참혹했다. 전쟁은 3년여를 끌었으나 정작 6.25를 소재로 한 가곡은 종전 후 10여년이 지나서야 탄생했다. <비목>이 그것이다.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치열한 전투 중 떨어진 꽃잎처럼 숨진 이름 없는 병사의 무덤과 목비(木碑). 그 것이 이 노래 속에서 되살아났다.

비목

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 비목 작사자 한명희 선생과 인터뷰하는 필자.
전쟁터의 나무 비(碑)
가사를 음미하며 이 노래를 들으면 당시 전쟁터의 모습이 그려진다.
가사 첫머리의 ‘초연(硝煙)’은 화약연기란 뜻이다. 간혹 ‘세속의 일에 구애되지 않는다’, ‘아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는 뜻의 ‘초연(超然)’ 즉 ‘초연하다’란 뜻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는데, 초연은 화약연기란 한자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좀 어렵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되는 1절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깊은 계곡, 그 화약연기 가득했을 격전지의 양지바른 곳에 쓰러진 채 남아있는, 오래되어 이름도 알 수 없는 목비(木碑) 즉 나무 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전쟁영화에서 흔히 보는 전사자의 철모를 얹어 놓은 십자 모양의 나무 비를 말하는 것이다.

▲ 작곡가 장일남
그리고 ‘먼 고향 초동(樵童: 땔나무를 하는 아이) 친구 두고 온 하늘가’로 이어진다. 그렇다. 전쟁으로 죽어간 젊은이도 두렵고 고독한 전쟁터에서 어린 시절 나무하러 함께 마을 뒷산에 오르내리던 고향 친구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죽어서도 그리움이 이끼가 되어 목비에 남아있을 만큼….

순찰 중 발견한 한 용사의 무덤
이 노래말을 쓴 한명희(1939~ ) 선생은 1964년 ROTC 소위로 임관해 강원도 백암산 인근 최전방에서 초소장(GP장)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순찰 중 희미한 흔적의 돌무지를 하나 발견했다. 전쟁 때 전사한 한 용사의 간이 무덤 같았다. 근처에는 목비였던 듯한 나무토막도 쓰러져 있었다. 전투의 와중에서 전사자를 급히 묻고 퇴각하는 일은 다반사였을 것이다.

한명희 소위가 근무하던 강원도 백암산 지역은 6.25 전쟁 당시 전략의 요충이었다. 화천발전소가 가깝게 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했고, 종전회담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을 취하기 위해 전쟁 막바지까지 남북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던 곳이다. 피아간에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격전의 현장이었다.

한 소위는 이 돌무덤을 보면서 ‘자신처럼 꽃다운 20대 청춘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이름 모를 산야에 백골이 되어 누워있구나’하는 생각에 깊은 연민이 느껴졌다. 이런 감정은 제대를 하고도 한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한 소위는 1966년 봄 제대를 하고 이해 12월 TBC 동양방송에 피디(PD)로 입사해 음악부에서 일을 했다. 음악부로 발령을 받은 것은 그가 서울음대 국악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한 피디는 대학에서 국악 이론을 전공했다.

한 피디는 본래부터 클래식과 가곡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가곡 보급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1967,8년쯤, 처음에는 20분짜리 주간 가곡 프로그램을 맡았다가, 다시 일일 가곡프로그램을 만들어 매일 15분씩 진행했는데, 노래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창작가곡을 만들어서 발표하기도 했다. ‘기다리는 마음’(김민부 작사, 장일남 작곡)이라든지, ‘얼굴’(심봉석 작사, 신귀복 작곡)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선을 보인 가곡이다. 시나 가사에 곡을 붙이는 일은 작곡가 장일남(1932~2006) 씨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로 시작되는 <기다리는 마음>을 쓴 김민부는 젊은 시인이었는데 불의의 화재로 일찍 세상을 떴다. 김민부는 당시 이 노래가 한시(漢詩)에서 온 것이라고 한 피디에게 말했다고 한다.

장일남씨 권유로 작사 시도
어느 날 장일남씨가 한명희 피디에게 가사를 한 편 부탁했다. 한 피디는 “내가 시인도 아닌데 어떻게 노랫말을 짓느냐”며 사양했다. 그런데도 계속 작사를 권유해왔다. 한 피디는 마침내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피디는 서양음악에 있는 송 폼 (song form)이라는 가곡 형식의 틀에 맞춰 가사를 만들어 보았다. 이때 잊지 않고 있던 과거 군대생활의 경험과 감상을 떠올렸다.

▲ 강원도 화천군 평화의 댐 비목 공원의 비목 시비.
초연이 자욱했을 백암산 계곡, 오래된 목비, 그 지역에 많이 서식하던 궁노루(사향노루), 궁노루의 울음소리, 금성천을 굽어보는 백암산 일대에 번성하던 하얀 산목련… 등이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언젠가 부대원들이 궁노루 숫놈을 잡아왔는데 사향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암놈이 부대주변을 맴돌며 애처롭게 울었다.

이 노래 2절의 가사인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은 바로 그 이야기다.
깊은 밤, 순찰을 돌다가 짙은 향기에 고개를 들어보면 순백의 산목련이 마치 소복한 여인처럼 은은한 달빛 속에 유령처럼 서 있곤 했다. 그 장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명희 피디는 두 개의 노래말을 만들었다. 하나는 전장에서 산화한 젊은 병사를 기리는 <비목>이요, 하나는 그 젊은 병사의 무덤을 지키는 연인을 비유한 <산목련>이다. 즉 <비목>은 남자의 입장에서 <산목련>은 여인의 입장에서 썼다. 이렇게 두 개의 가사를 만들어 비목은 장일남씨에게 산목련은 작곡가 권영순씨에게 주었다.

‘산목련’은 ‘파도소리가 서러워서 산에 핀 목련이여…’ 이렇게 시작한다. 테너 안형일과 팽재유가 불렀는데 그후 방송 테잎이 지워지는 바람에 가사도 곡도 모두 잃어버렸다. 미국에 이민간 작곡자 권영순씨도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

한편, 이리저리 궁리해서 만들긴 했지만 장일남씨에게 가사를 넘기면서도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특히 <비목> 2절 가사 중에 ‘적막감’이란 단어가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장일남씨에게 한일무(韓一無)라는 가명을 썼으니 절대로 본명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다짐을 받고 가사를 넘겼다. 그래서 한일무 작사 장일남 작곡 <비목>이란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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