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부터 좁다.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땅속으로 들어간 구찌터널은 터널이라기보다 동물의 굴처럼 협소하다. 낮은 포복을 하듯 몸을 최대한 움츠리지 않으면 무릎이 바닥에 부딪치고 어깨 머리가 벽과 천장에 닿기 일쑤다. 키 173cm에 65kg의 마른 체구인데도 안으로 들어선 구찌터널은 너무 작다.
앞서가는 일행의 꼬리를 놓쳐버리면 미로 같은 칠흑 속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까지 든다. 숨이 가빠진다. 여행코스로 개발하면서 굴속에 듬성듬성 설치해 놓은 꼬마전구-크리스마스트리용 전구보다도 밝기가 어두워 보였다- 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지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였으리라. 몸의 균형을 잡으며 나아가는 동안 여기저기 손길에 닿은 터널내벽은 습기에 젖은 점성토질이었는데, 마치 시멘트용 콜타르처럼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하다. 그러나 손톱으로 긁어 본 흙은 놀랍게도 부드럽게 패였다.
몇발짝이나 갔을까. 땀이 쏟아진다. 안경은 콧잔등에서 자꾸 미끄러져 내리고 옷은 흠뻑 젖었다. 힘겹게 80m 길이의 체험코스를 빠져 나온 나는 그대로 탈진하듯 기진맥진해졌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터널 속에서 걸어야 했던 오리걸음 때문에 장딴지 근육이 뭉쳐 귀국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모골이 송연했던 체험

‘인간 의지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멋모르고 찾아간 구찌터널은 기자를 오래도록 송연하게 만들었다.
구찌터널 체험에 앞서 관람한, 베트남 당국이 제작한 15분물 다큐멘터리 홍보영상물은 충격이었다. 우리말, 그것도 북한말이 아닌 서울 표준말로 더빙된 이 다큐물은 ‘괴뢰정권(통일전 친미적 월남정부를 일컬음)의 중심부인 사이공을...’ ‘야만적인 미국 침략자들을 급습함으로써...’ 등등 적나라한 표현을 동원하며 구찌터널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펼친 전쟁영웅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한국인 관광객이 늘자 아예 한국어 홍보영상물을 따로 제작해 놓은 것이다.
미국은 월남전 당시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시)외곽에 위치한 구찌지구를 점령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미국은 이곳의 장악을 위해 B-52폭격기를 동원, 무게가 250kg이 넘는 폭탄들을 집중적으로 투하해 구찌지역을 깔아 뭉개버리려 했다. 융단을 깔 듯 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융단폭격(carpet bombing)’이 감행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구찌를 점령하지 못했다.

10년간 완벽한 비밀유지

구찌터널은 말할 것도 없고 구찌유격대의 실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분명 뭔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터널인지 무언지, 터널이 있다면 어디에서 어디까지 구축돼 있고 입구는 어디에 있는지 등을 전혀 모른 것이다. 1975년 미국이 패전하기까지 10년이 넘도록 구찌터널은 베트남 국민의 가공할 단결로 그 비밀이 완벽히 유지됐다.
다큐 영상물은 베트남의 잔다크라는 별명을 가진 갸날픈 여성 유격대원-지금도 생존하고 있다는 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의 활약상도 소개했다. 이 여성은 신출귀몰하듯 미군의 전후방에서 기습전을 감행해 치명적 타격을 입히고 노획한 무기로 자제(自製)무기를 개발하거나 부비트랩(booby trap)을 만들어 대항했다. 영상 다큐물은 “구찌유격대원들은 미군의 무기로 미군을 살해하는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껏 자랑하며 “주민들로 구성된 유격대원들은 밤에는 총대신 호미를 잡아 전쟁통에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고엽제 쏟아붓고도 실패

이랬으니 구찌터널이 미군에게 얼마나 끔찍한 존재였을까. 그 악명 높은 다이옥신 주성분의 오렌지 에이전트(고엽제)가 월남정글에 뿌려진 것도 구찌터널에 대한 미국의 편집증적 집착 또는 공포심이 부추긴 ‘추악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미국은 고엽제를 무려 4200만 리터나 정글에 쏟아 부었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패전의 멍에를 쓴 채 씁쓸히 퇴각해야 했다. 고엽제로 인해 1세는 물론 2세에 이르기까지 후유증을 앓고 있는 베트남 국민이 아직도 100만명에 이른다.
이상과 같은 구찌터널 인상기는 안티 코뮤니즘이나 레드 콤플렉스적 시각에서 본다면 용인하기 힘든 얘기일 지 모른다. 반공의 보루국가인 남한의 지식인이 구찌터널을 찾아 그들의 선전 영상물을 관람하고 또 직접 체험한 것도 모자라, 감탄의 소회까지 밝힌다는 것은 예전엔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한-베트남, 미국-베트남이 수교하고 한때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적대국 국민이 이렇게 자유롭게 구찌터널을 방문할 수 있게 됐으니 새삼 역사의 아이러니가 허허롭기까지 하다. 하긴 케네디대통령때 국방장관에 취임한 이후 사실상 월남전을 진두지휘했던 로버트 맥나마라 조차 “월남전은 잘못된 전쟁”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민족정신의 정체

구찌터널은 베트남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단결력,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불굴의 정신이 발현시킨 실로 위대한 구조물이었다.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베트남국민들이 맨손과 호미로 일일이 땅속을 파 건설한 것이 총연장 250km에, 사이공 시내의 미군사령부 기지 밑까지 파고 들어간 구찌터널이다. 가장 깊게는 지하 8m까지 다층구조에 지그재그 형태로 거미줄처럼 구축, 2개 연대 1만5000명의 유격대원과 주민들이 거주한 구찌터널은 군사작전회의까지 할 수 있도록 회의실을 비롯해 주방 휴게실 공연학습장 시장(市場) 등을 갖춘 지하도시이기도 했다.
물론 기자가 찾은 곳은 호치민시에서 북서쪽으로 60km 떨어져 있는 구찌터널망(網)의 하나인 벤딘터널로, 기자는 지하도시가 아니라 단순한 지하통로만을 체험했는데도 그만 압도당했다.
“정말 위대하고 섬세한 구조물이 아닐 수 없다.” 종전후 현장을 둘러본 어느 AP기자가 감탄하며 내뱉었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구찌터널은 베트남 민족의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지고한 정체(精體)였다.
/임철의기자





월남전을 다룬영화는 거짓?
미군이 베트콩들이 은신해 있는 땅속 터널을 발견하고는 M16소총과 수류탄 등 개인화기를 든 채로 굴속으로 들어간다. 잠시후 뭐라고 외치는 고함소리가 총소리와 섞여 나오고, 미 병사가 땅굴에서 뛰쳐나오며 수류탄을 던진다. 수류탄은 얼마뒤 굉음과 함께 폭발한다. 직설화법의 화면처리는 없지만 터널 속 베트콩이 전멸한 것은 물론이다.

정확히 영화이름을 모르더라도 분명히 미국이 만든 숱한 월남전 소재 영화중 어디에선가 본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이다. 왜? 미군이 월남전을 치르면서 구찌터널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월남전이 한창일때 대학생으로서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지난해 베트남을 방문하고 베트남과 미국 관계가 수교를 통해 정상화한 지금도 베트남에는 반입금지된 영화목록들이 있다. ‘플래툰’ ‘지옥의 묵시록’ 등 월남전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들이 그것이다. 현지 가이드는 “이 영화들은 할리우드식 문법으로 월남전을 미국의 시각에서 다룬 작품들”이라며 “이 때문에 월남전의 기본 성격과 개념을 정의하는 부분은 물론이고 세부적으로는 구찌터널에 대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허구투성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구찌터널을 체험해 본 입장에서 보면 미군들이 설사 구찌터널을 찾아냈더라도 터널 내부에 단 10m도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평균 신장과 몸집에서 베트남인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미군들이 소총 등 개인화기까지 무장한 채 ‘토끼굴’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인들은 남성이나 여성 모두 신장과 몸집이 한국인과 비교해도 뚜렷하게 왜소했는데, 특히 여성의 경우는 성인의 평균 신장과 몸무게가 우리나라 초등학교 4학년 학생 정도에 불과해 보였다.
구찌터널은 250kg짜리 폭탄이 공중에서 떨어져도 견딜 정도로 단단하면서도 호미질에는 쉽게 패이는 독특한 물성의 점성(粘性)토질에다가 투철한 민족의식, 그리고 자신들만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작은 체구에 맞춰 설계한 지혜 등 ‘3위 일체’가 이뤄낸 위대한 공학적 결과물이다. /임철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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