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서 함께 살 곳이 세상에 없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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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서 함께 살 곳이 세상에 없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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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1.10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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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노래> (2)
▲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목월이 처음부터 H양을 동반하고 제주도에 간 것 같지는 않다. 목월이 김남조(여,1927- ) 시인과 1962년 함께 펴낸 수상집 <구원(久遠)의 연가(戀歌)>(구문사)를 보면, 목월이 쓴 ‘가을의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 수녀(修女)가 되겠어요.
문득 입술에 떠오르는 말이다.
- 수녀가 된다.
그렇지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인사였다. - 먼 옛날의. 이제는 종소리처럼 사라져버린, 창창하고 빛나는 그 아름다운 염원을. 그 여인을.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그러나 서로 헤어졌다.
바보들······.
그녀가 바다를 건너왔을 때, 나는 당황했을 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길을 걸으며 궁리해 보았지만, 숨어서 살 곳이 이 세상에는 없을 듯 했다.
바보들.
눈물에 젖은 그의 긴 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얼굴을 외면한 채 말이 없었다.
- 수녀가 되지요.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차창에 얼굴을 부비며 울고 떠났다.
그 후로 소식이 막혔다.
산과 바다와 구름이 가로놓인 채 어언간 삼십여년.
가을을 비가 뿌린다.
숙연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문득 붓을 놓고 귀를 기우린다.
이제 인생도 살만큼 살았다.
지난 시간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더욱 짧을 것이다.
다시 그를 만날 기회는 없을 것이며, 만나도 서로의 얼굴조차 기억할 것인가.
그 후로 나의 회한의 강물도 흐를 만큼 흘러버리고, 바닥이 들어났다.
이렇게 우리의 인연은 영영 그쳐버릴 것인가.”

▲ 건천초등학교에 있는 목월의 '윤사월' 시비.

이 글 가운데 ‘바다를 건너왔다.’ ‘수녀가 되겠다.’는 이야기. 이건 순전히 필자의 추측이지만, 목월이 먼저 제주에 간 뒤에 H양이 따라간 것이 아닐까? 또, ‘수녀가 되겠다.’ 는 말은 상심한 H양이 한 말이 아니었을까? 과거엔 ‘중이 되겠다.’ ‘수녀가 되겠다’ 는 말은 상심한 남녀가 흔히들 내뱉는 단골 레퍼토리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말 잘 안하는 것 같다.

‘산과 바다와 구름이 가로놓인 채 어언간 삼십여년’이라고 했다. 책의 출판이 1962년이므로 30년 전이라고해도 목월의 나이 16세. 그 ‘삼십년’이란 어떤 구체적 시간이라기 보다는 지나간 세월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독자들이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짐작할 수 없도록.

목월의 제주 생활
워낙 오래 전의 일이고 사사로운 일이어서 확인은 잘 안 되지만, 목월과 H양의 제주 생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단편적인 기록들이 있다.

“시인은 낯선 제주에 내려와 서문통 여관에 잠시 몸을 맡기고 있었다. ----- 그 후 목월은 칠성통 남궁다방에서 우연히 알게 된 젊은 양중해 시인에게 “어디 어촌에 파묻혀서 몇 달 쉬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청년 양중해는 시인의 부탁대로 용두암 부근의 초가집을 마련해 준다. 시인은 당시 아리따운 소녀를 데리고 있었다. 시인은 초가를 마련해준 청년에게는 소녀를 친구라고 소개했다. 시인은 이 소녀를 ‘열아’라고 불렀다. 이런 제주에서의 생활이 수개월 남짓 되었을까 -----시인과 함께 제주로 내려온 소녀를 찾기 위해 소녀의 부친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제주까지 찾아왔고 마침내 시인과 소녀의 짧은 사랑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주문단야사’ 오마이뉴스, 2000년 4월)

“제주에서 두 사람은 제주항에서 멀지 않은 관덕정 인근 동화여관에 머물렀다. 여관에서는 시 낭송회가 자주 열렸는데, H는 늘 목월 곁에 다소곳이 앉아 경청했다. H는 목월에게 꼭 선생님이라고 불러 선생님과 제자 사이 같았다. 그녀는 깔끔한 성격이어서 빨래를 자주했으며 밥도 직접 지어 시인에게 드렸다. 그녀는 예쁘고 호리호리 했으며 자주 아파서 병원 출입이 잦았다. H의 아버지가 목사란 얘기도 있는데,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인근 교회에 나갔다. (성명미상 인터넷 글)

“양중해 선생을 모실 당시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박목월 선생은 칠성통에 있는 여인숙(동화여관?)에 방을 얻어 육지에서 같이 온 20대 초반의 문학소녀와 살았다.

소녀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찾아와 딸을 설득시켜 데리고 가게 되는데, 떠나기 전날 소녀는 제주에서 도움을 받은 목월 선생의 친구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게 된다. 생활이 어려운 터라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 바꿔 온 쌀로 손수 저녁을 지어 대접하였다. (제주문화원 현태용 사무국장, 2010년 9월 전언)

▲ 설악산에서 학생들과 (1969), 뒷줄 키 큰 이가 목월.

목월은 제주에 있을 때 제주대학에서 시간 강사를 했다. 또 오현중학교에서 특별지도 형식으로 시작(詩作)도 가르쳤던 모양이다. 중학교에서의 시작 지도는 제주의 이름 있는 문인 이었던 국어교사 김영돈 선생이 주선한 것 같다.

그 당시 목월에게 시작을 배운 제자 중에 이형균(李炯均)이란 학생이 있었다. 이형균 학생은 목월 선생 앞에서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하기도 했던 그 때를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이형균은 1956년 중학교를 졸업했다. 목월 선생에게 배운 때는 1954년에서 1955년 무렵. 목월이 제주에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형균은 그 후 서울대를 졸업한 뒤 언론계에 투신, 경향신문 워싱턴 특파원, 편집국장을 거쳐 한국신문방송인 클럽 회장, 서울대 관악언론인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칠순이 넘은 지금도 인하대학교 객원교수로 후학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눈물의 훼어리
우여곡절 끝에 박목월이 H양과 이별하던 날, 목월과 가깝게 지내던 양중해 선생이 부두까지 동행했다. 당시 양중해 선생이 그 애절한 이별의 장면을 보고 쓴 시가 <떠나가는 배>라는 얘기가 있지만,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는 점을 지난번 ‘<떠나가는 배> 오딧세이 (2)’에서 기술한 바 있다.

목월의 부인 유익순 여사의 제주행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H양의 아버지가 제주에 와서 딸을 설득해 데려갔다는 이야기는 여러 증언들이 일치하는 것 같다.

▲ 목월이 다녔던 경주의 건천초등학교.
아무튼 이러한 이별의 아픔을 겪은 뒤에 목월 시인에 의해 <이별의 노래>가 지어졌으며, 부두에서의 이별의 장면을 보고 <떠나가는 배>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연애사건의 피날레로 매우 그럴 듯하다. 특히 주인공이 유명시인이기 때문이다. 두 노래가 다 유명한 가곡이므로 음악영화로 만들어도 근사하지 않겠는가.

사실 여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굳이 말한다면 가곡 <이별의 노래>는 김성태 작곡으로 이 사건 2-3년 전 부산에서 이미 발표된 노래이다. 제주의 로맨스는 1954년 가을에 시작해 제주에 유채꽃이 만발하던 1955년 초봄 사이의 일이다.

목월이 서울에 돌아온 후 H양을 떠 올리며 쓴 시는 -이것 역시 확실하다고 주장할 수 없지만- <눈물의 Fairy> [Fairy는 요정(妖精)의 뜻]로 알려져 있다.

눈물의 Fairy

흐릿한 봄밤을
문득 맺은 인연의 달무리를
타고. 먼 나라에서 나들이 온
눈물의 훼어리.
(손아귀에 쏙 드는 하얗고 가벼운 손)

그도 나를 사랑했다.
옛날에. 흔들리는 나리꽃 한 송이······
긴 목에 울음을 머금고 웃는
눈매. 그 이름
눈물의 훼어리······
---(후략)---

목월은 오랫동안 이 여인을 잊지 못했다. 1960년대 초에 쓴 그의 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2월 10일(일) 맑음

내세(來世)를 믿느냐 --- 이것은 지난 목요일, 수도여대에서 어느 학생이 질문한 말이다. 너무 엄청난 질문이므로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꼭 같은 질문을 한 10년 전에 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물어 본 일이 있었다.” [ <이별의 노래>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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