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이별의 노래
박목월 작시 김성태 작곡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목월의 제주행과 슬픈 이별

▲ 박목월 시인
한 유명 시인이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대생과의 헤어짐의 아픔을 노래한 시가 <이별의 노래>라는 이야기는 1980년대에 나온 ‘박목월 평전·시선집’ <자하산 청노루> (이형기 편저, 문학세계사, 1986년>에서 이 스토리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세간에 기정 사실로 알려져왔다.

<자하산 청노루>에서는 이 연애 사건에 ‘이별의 노래’란 제목을 달아 평전(評傳)의 일부로 8쪽(65~72쪽)에 걸쳐 자세히 적어놓았다.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흥미진진한 러브 스토리이다.

신문, 잡지 등 워낙 여러 지면에서 이름있는 문인들이 대체로 이 책의 기록을 근거로 ‘시인의 애틋한 사랑이 낳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라며 박목월(1916~1978)의 <이별의 노래>를 진지하게 설명해 놓았으므로 누구도 그 이야기를 의심치 않았다.

평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박목월이 피난시절 대구에서 알게 된 H씨 자매가 있었다. 자매가 모두 목월의 시를 좋아해 목월을 자주 찾아왔다. 처음에는 흔히 있는 팬과의 만남 정도로 대했다. 언니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러는 사이 휴전(1953년 7월)이 성립되었다. 목월은 가족보다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의 대학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사이 자매도 상경했다. 자매의 아버지가 부유했으므로 흑석동에 집을 사 두고 자녀들을 공부시켰던 것이다. 언니가 서울에서 결혼을 하자 이번엔 동생이 혼자 목월을 찾았다.

▲ 박목월 시인의 부인 유익순 여사
동생의 가슴에 사랑의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목월도 그녀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1954년 초봄부터, 두 사람이 서울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날이 많아졌다.
목월은 4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자책감으로 괴로웠다. 어느 날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있는 가까운 시인 Y를 불러 H양을 만나 자신을 단념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Y씨를 만난 H양, Y씨의 말을 듣고 나서,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저는 다만 박 선생님을 사랑할 뿐, 이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무상의 사랑은 누구도 막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그해 여름이 가고 가을 바람이 불어 왔을 때 목월은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와 함께 제주도로 떠난 것이다. 두 사람은 제주에서 넉달쯤 동거를 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극적이다. 편저자는 사건 이후 20년쯤 흐른 후 여류시인 K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면서 이렇게 옮겨놓았다.

[그 제주 생활이 넉 달째 접어들어 겨울 날씨가 희끗 희끗 눈발을 뿌리던 어느날 부인 유익순이 제주에 나타났다. 목월과 H양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온 그녀는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 놓았다. 보퉁이에는 목월과 H양이 입고 겨울을 지낼 수 있는 한복 한 벌씩이, 그리고 봉투에는 생활비에 보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남편은 물론 H양에 대해서도 그녀는 전혀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고달픈 객지 생활을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 앞에서 H양은,
“사모님!”하고 울었다. 목월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

▲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목월 생가 가는 길의 이정표.
결국 목월은 가정으로 돌아왔다. 제주생활 넉 달을 치르면서 유익순 앞에서 울었던 H양은 목월을 단념하게 된 것이다. 널리 애창되고 있는 목월 작사의 <이별의 노래> 가사는 H양과의 이별의 심정을 읊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효자동 종점 근처 쓸쓸한 하숙집
목월은 H양과의 이별 후 제주에 좀 더 머물다 1955년 초봄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원효로의 집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효자동 종점 부근으로 하숙을 들어간다. 그 무렵 지은 시로 <효자동> <뻐꾹새> 등이 있는데, 당시 목월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효자동(孝子洞)

숨어서 한철을 효자동에서
살았다. 종점 근처의 쓸쓸한
하숙집.

이른 아침에 일어나
꾀꼬리 울음을 듣기도 하고
간혹 성경을 읽기도 했다.
마태복음 5장을, 고린도 전서 13장을.
…(후략)…

뻐꾹새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이른 새벽에 깨어 울곤 했다.
나이 들수록
한은 짙고
새삼스러이 허무한 것이
또한 많다.
…(중략)…

뻐꾹새는
새벽부터 운다.
효자동 종점 가까운 하숙집
창에는
창에 가득한 뻐꾹새 울음……
모든 것이 안개다.
…(후략)…

▲ 목월의 생가터. 1980년대까지 옛집이 있었다고 한다.
평전의 편저자는 목월의 제주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는다.
“그 하숙생활은 두 달 남짓 끌다 끝났다. 집으로 돌아온 목월은 전보다 더 충실한 가장이 되었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 격이라 할까. 부인 유익순은 돌아온 남편을 물론 한마디도 탓하지 않고 반갑게 그리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월 작사 <이별의 노래>의 가사가 H양과의 이별의 심정을 읊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든지, ‘부인의 제주 방문’ 등 편저자의 전언(傳言)은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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