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흔히 ‘-----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로 끝나는 4수까지를 <가고파 전편>, 그 다음 나머지를 <가고파 후편>으로 부른다는 얘길 했지만, <가고파 후편>의 내용과 곡이 어찌 들으면 오히려 <전편>보다도 가슴 속에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인생의 가는 길이 참으로 이 시와 같다. 철없던 어린 시절, 세상사 모르던 날이 그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 단지 그리워할 뿐이다. ‘잃어진(잃어버린) 내 기쁨의 길’을 아까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 역시 누구에게나 같을 것이다.

시도 좋고, 곡도 참으로 훌륭하다. 전편은 워낙 유명하지만, 전편 작곡 후 40년 만인 1973년에 완성된 후편은 따로 부르는 일이 드물고, 전편보다 훨씬 더 길며, 전·후편을 합쳐 장장 11분 가량이나 되기 때문에 후편의 경우 가곡 애호가들 외에는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이 안타깝다.

과거엔 우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이 <가고파>였는데, 그 후에 <그리운 금강산>에 1등 자리를 내주었다고 하지만, 애창곡 순위도 세월이 가면 바뀌는 법. 그게 1,2등을 가릴 일은 아니라고 본다.

▲ 스스로 국보라 칭했던 양주동 박사
양주동 선생에게 배운 <가고파>

<가고파>를 작곡할 당시인 1933년 김동진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 학생이었다. 스무살 이라고 하지만 서양식으로 따지면 열아홉이었다고 한다. 김동진은 담임이었던 양주동(1903-1977) 선생으로부터 이 시를 배운 후 크게 감동을 받아 곧바로 작곡을 시도했다.
다음은 본인의 술회;

“<가고파>는 당시 나의 담임인 양주동 선생에게서 배운 시로서 그것은 나에게 작곡하고 싶은 어떤 충동을 불러 일으켰으며, 더욱이 이 시의 작자인 이은상 선생과 양주동 선생과는 퍽 친분이 두터운 사이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 <가고파>를 작곡하여 그것을 말스베리 선생에게 보여 드린 것이 그분에게 나의 창작적 재질을 인정 받게 되어 또다시 화성학, 대위법, 작곡법, 그리고 피아노와 조율(調律, 피아노 조율을 말함)까지도 배우게 된 계기가 되었음은 내게 있어 실로 크나큰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김동진 가곡집>, 세광출판사, 1973]

말스베리(Dwight R. Malsbary) 선생은 미국인으로 김동진이 숭실중학 3학년 때부터 바이올린 등 음악 전반을 지도해준 은사이다.

▲ 작곡가 김동진
김동진은 숭실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 고등음악학교에 유학해 바이올린 공부를 계속했는데, 숭실전문학교 때 말스베리 선생에게 배운 피아노 조율이 생활과 학비조달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가고파>를 작곡한 김동진이오”

김동진은 일본 고등음악학교 바이올린과 졸업 후 만주로 가 당시 만주국의 수도였던 만주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제 1바이올린과 작곡을 담당하게 된다.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6.25 전쟁 때 월남을 하게 되는데, 신분증도 없이 헌병의 검문을 당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가고파>의 작곡자임을 밝혀 검문을 통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동진 작곡집>에 실려 있는 본인의 회고다.

[1950년 6.25가 발발한 해 12월. 나는 파괴된 대동강을 마치 곡예를 하듯 건너와 나의 숙부와 두 누이동생을 만났으며 사리원, 임진강을 거쳐 서울에 당도한 우리는 또 다른 난관에 부닥쳤다.

▲ 전쟁 중 국군 복장의 김동진(오른쪽)과 작곡가 변훈
그것은 헌병의 검문을 받는 일이었는데 우리 일행은 아무도 신분을 밝힐 만한 증거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나는 궁여지책으로 “당신 <가고파>라는 노래 아시오?”하고 물었더니 의외로 두 헌병 모두 안다는 것이었다. “내가 바로 그 노래를 작곡한 김동진이오”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자, 여기 이것으로 내가 김동진이란 것은 증명이 될 것 같은데 ---” 하며 국군이 평양에 입성(入城)했을 때 재조직된 교향악단의 지휘자 증명을 보여주었으나 그래도 못 믿는지, 한 헌병이 있다가 자기가 내 음악회를 본 적이 있다면서 그때의 상황을 말하라는 데까지 검문이 발전되고 나서야 두 헌병이 친절히 <가고파>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때 비로소 <가고파>가 오히려 여기(남한)서 널리 불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동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인 기독교집안이라는 출신성분 탓에 북한에서는 기를 펴고 살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그가 작곡한 <가고파>도 북쪽에서는 잘 불리우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전쟁이 터진 후 그가 월남한 동기이다. 월남 후 그는 종군작가단원으로 국군 정훈국에 배속되어 수십곡의 군가를 작곡했다. 군에 갔다온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행군의 아침>도 김동진이 작곡한 것이다.

그러나 월남작곡가라고 하여 한때는 일부 이남음악가들로부터의 시기와 음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전쟁 중 육군 정훈감실에서 <6.25 노래>와 <육군가>를 잇달아 공모했을 때 김동진이 작곡한 노래가 연이어 당선되었는데, 그후 ‘김동진은 빨갱이’라는 투서도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훈국에는 옛 친구인 시인 양명문이 함께 있어 든든했고, 나이는 그보다 한참 아래지만, 서글서글한 성격의 작곡가 변훈과도 훈훈한 정을 나누었다. 김동진은 그 뒤 해군 정훈음악대 창작부장으로 근무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서라벌예대 교수를 거쳐 경희대 음대교수로 정년까지 봉직했다.

그가 작곡한 가곡은 <가고파 전·후편>을 비롯해 <봄이 오면> <발자욱> <내마음> <수선화> <샘가에서> <못잊어> <님의 노래> <길> <초혼> <진달래꽃>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등 100여곡에 이른다.

이 가운데 파인 김동환의 시에 곡을 붙인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 ”로 시작되는 <봄이 오면>은 숭실중학 5학년 때 작곡한 것이다. 18세 때다. 김동진은 당시 음악실에서 풍금을 치며 발성연습을 하던 중 이 곡의 악상이 떠올라 이를 즉시 오선지에 옮겼으며, 자신이 지은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마음이 온통 황홀감에 차 있었다고 한다.

▲ 마산시내와 앞바다
그는 한방에 지내던 장대욱(張大郁)에게 처음 이 노래를 불러주어 같이 불렀고, 그후 <봄이 오면>은 삽시간에 온 기숙사와 학교에 퍼져 애창되었다. 그가 작곡에 대한 집념을 불태우게 된 계기였다. 그 후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작곡한 것이<가고파>이다.
노산에 대한 두 가지 평가

한편, 노산 이은상에 대한 평가는 두 갈래다. 하나는 민족의 시(詩)인 시조를 지키는 일에 힘써온 민족시인이며 일제 말기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연이어 옥고를 치렀고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한 애국지사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의 3.15의거를 폄훼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역대 정권에 영합하여 일신상의 영달을 꾀한 반민주적 인물이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굽이굽이 풍진 세월 긴 인생길에 뛰어난 문학적 업적도 쌓았지만, 또 그처럼 후세에 비판받을 일도 있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 노산이 바라던 나라, 그가 살고 싶었던 삶은 어떠했을까? <가고파> 맨 뒤 10수에 그 답이 있는 듯하다.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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