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對) 서구관에 대한 종교적 입장 객관화 필요
공공성과의 맥락화 시도로 대중적 기반 확산해야

▲ 전석환 교수(경기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본 글은 금강대도의 ‘남천포덕 100주년 기념 제2차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전석환 경기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의 주제문을 발췌한 것입니다.

1. 믿음의 측면에서 본 금강대도

금강대도의 유·불·선의 삼교합일은 대도덕 성사건곤부모님이 불교적 측면으로는 ‘미륵대불’이고 유교적 측면으로 말하자면, ‘만고대성인’이며, 도교적 측면에서는 ‘옥황상제’라고 제시된다.

만약에 이러한 존재의 궁극적 본질을 실체성으로 설명한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실체주의적 오류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금강대도에서 말하는 궁극적 도(道)는 결국 비실체적인 것으로 해명되어야 한다고 보여진다. 주역의 한 구절은 이러한 관점을 단적으로 언어와의 관계에서 드러낸다.

『공자가 말했다. ‘글은 말을 다 표현할 수 없고, 말은 생각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인의 생각은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성인은 생각을 다 표현하기 위해 전형을 수립했고, 참과 거짓을 남김없이 표현하기 위해 괘를 만들었으며, 할 말을 다하기 위해 이것들에 설명을 붙였다』

『이런 관점에 연계시켜 앤거스 그레이엄는 도의 비실체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도 자체는 단지 상대적으로만 비실체성을 띤다. 다시 말해 인간을 위해 서로 다른 용도를 가진 물질적 사물들은 지상에서 형체를 띠는 천상의 도이다』

더불어 금강대도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도(道)가 유불선의 삼종일합의 관점에서 조명된다면, 동양사상에서 흔히 언급되는 무위(無爲), 무아(無我), 무상(無常) 등의 개념을 통해서도 해명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서양에서의 나(Ich)는 고립된 개체 그 자체라 할 수 있고 결국 이기주의(egoism)를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을 이루게 된다.

반면 동양적 세계관 안의 자신인 자기(自己)는 ‘공동체 안의 일원’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무(無)의 작용을 통해 여과된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기는 무위(無爲), 무아(無我), 무상(無常)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즉 실체론적 나를 해체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금강대도는 이러한 점을 천·지·인의 통합 하에 신을 상정하고 세상의 모든 존재를 형제나 붕우로 본다는 점에서 나 자신은 결코 실체론적 관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유교적 범주 지닌 유기체적 자연관 갖춰
실체주의를 피할 수 있는 또 다른 시도는 유교의 근본성을 유교의 체계화 이전의 성격 규명에 합류시키는 관점이다. 즉 금강대도에서 유교적 성격을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유교 그 자체의 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대도가 비록 삼종일합을 표상하지만, 건곤부모의 본질을 공자와 같이 학이지지(學而知之), 석가와 같이 곤이지지(困而知之)와 상이하게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성인으로 특성 짓는다. 그러한 담론체계는 유교의 전통성 이전, 즉 공자에게서 시작된 원시 유교, 혹은 이론 체계를 지닌 경학시대 등장 훨씬 이전의 ‘원유(原儒)’에서 나타나는 유교적 성격을 전혀 반영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지적될 수 있다.

가지 노부유끼(加地伸行)는 유교의 효(孝) 개념을 동아시아의 전통적 ‘가족주의이론’, ‘정치이론’ 구축의 핵심개념으로 이해하지만, 그 효 개념이 이론화되기 이전의 의미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는 효 개념을 “원유의 샤마니즘을 기반”한 “독자적 개념”으로 상정시키면서 그 본질을 “생명론”의 철학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가지 노부유끼는 “샤마니즘을 기초로 정치이론까지를(다시 뒤에 우주론, 형이상학도) 지니고 있는 이론은 아마 세계에서 유교뿐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유(儒)는 초혼의례라는 동서고금에 어디든지 있는 주술을 생명론으로 구성했으며, 죽음의 공포 불안을 해소하는 설명을 하는 데 성공했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물론 한국 신종교 모두가 유교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이미 언급했지만 금강대도에 있어 유교적 특징은 전형적인 유교의 범주를 지니면서도, 그것의 범주로는 설명이 가능치 않은 독특성이 있다. 이러한 독특성은 유교의 현세주의 등과 같은 피상적 범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가지 노부유끼가 제시하는 ‘생명론’과 같은, 즉 유기체적 자연관의 관점을 통한 심층적인 고찰이 필요할 듯하다.

2. 지식의 측면에서 본 금강대도

『오늘 날 몇몇 종교가들이 개벽이라는 말로 중생들의 이목을 끌고 있지만, 어디 지금이 개벽의 시대인가? 개벽이란 말 그대로 천개(天開), 지벽(地闢)이라고 해서 천지가 새로 열리는 엄청난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루로 치면 새로운 하루가 열리는 새벽이요, 1년으로 치면 새해가 열리는 원단(元旦)을 말하는 것이니 묵은 하늘과 땅은 없어지고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그야말로 인식을 초월하는 현상이다. 지금은 그러한 시대라기보다는 오전의 생기를 순화하여 오후의 정돈으로 가져가는 시기이며, 여름의 분열과 발달을 갈무리하여 가을의 성숙과 결실로 넘어가는 시기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개벽의 시대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이재헌, ‘건곤부모님과 금강대도의 진리’ 인용>

그리고 오중운도는 선천의 양(陽)의 시대, 즉 봄과 여름, 남성주의의 시대가 마감되고, 음(陰)의 시대, 즉 하루로 보면 오후, 1년으로 보면 가을로 접어드는 여성성이 강해지는 과도기의 시대이다. 금강대도에서는 이러한 구체적 시간대를 소강절(邵康節)의『황극경세(皇極經世)』에서 제시되는 원회운세(元會運世)의 법칙으로 금강대도의 ‘오만대운(五萬大運)’, 혹은 ‘오만성업(五萬聖業)’의 목표시기를 구체화하고 있다. 그래서 개벽은 이미 5만 년 전의 일이고, 현재의 시점은 후천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오회(午會)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일은 금강대도에서는 물리적 변화를 지시하는 개벽 대신 ‘인간 도덕성의 개화(開化)’를 더 긴박한 사실로 제시한 데에 있다. 이러한 시도의 의의는 일단 변혁의 내재화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더 큰 의의는 전제된 물리적 시간을 구체화하지 않으면서, 도덕성이라는 가치를 표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금강대도 교리의 변증법적 관점
변증법(Dialektik)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한자는 정립(These), 반정립(Antithese), 종합(Synthese)의 세 단계의 발전 과정을 밟게 되는데, 이때 종합은 절대적 완성이 아니라, 또 다른 정립으로서 또 다른 반정립과 종합으로의 지양을 예비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과정은 우리가 궁극적인 것에 도달하기까지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상정한다.

이러한 구조는 금강대도의 교리를 잘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보여진다. 첫째는 금강대도에서 말하는 우주만물의 근본인자인 ‘일기(一氣)’로부터 출발해서, 소위 유불선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도(道)로 이루어진 시기를 정립(定立/These)의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선천의 석가, 공자, 노자 등의 성인의 출현 시기이다. 그러나 3교의 출현 이후는 아장피단(我長彼短)으로 그 목표에 맞지 않은 파국의 현상으로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계기는 바로 반정립(反定立/Antithese)의 등장과 더불어 또 다른 지양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선천의 시대적 상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셋째는 ‘合而復散 散而復合’, 즉 “합하였던 것이 나누어지고, 나뉘었던 것이 다시 합치는 이치”의 실현이 요청되는 종합(綜合/Synthese)의 계기이다. 금강대도에서의 이러한 종합의 궁극적 목표를 도성덕립(道成德立)의 상태, 즉 ‘천하귀인(天下歸仁)’ 혹은 유가식 표현으로 ‘대동세계(大同世界)’로 표상한다. 그리고 대도에서는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도덕문명의 개화(開化)를 향한 의성(義誠)의 정신을 제시한다. 또한 대도에서는 그 정신의 구체적 실천을 백지환원(白紙還元), 중용지도(中庸之道), 지성무식(至誠無息)으로 구체화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의성일관(義誠一貫)으로 수행을 한다면, 신선, 부처, 성인, 군자 모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여기서 주위 깊게 살펴 볼 사안은 금강대도에서 보는 반정립 안에 있었던, 혹은 선천에 존재했던 유불선에 대한 시각이다.『교유문』의 <삼조일근장>은 선천의 유불선의 의의를 이렇게 의미 짓고 있다: “유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오륜삼강(五輪三綱)으로 작성인(作聖人) 군자(君子)하며, 불교는 대자대비(大慈大悲) 계살방생(戒殺放生)으로 작불(作佛)하며, 선교는 청정무위(淸淨無爲) 심청신안(心淸神安)으로 작선(作仙)한다.” 또한『성훈통고』에서는 그 관계를 이렇게 비유한다.

“석가세존은 오른쪽 갈빗대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도를 위주로 하고, 태상노군은 왼쪽 갈빗대에서 나왔기 때문에 좌도를 위주로 하고, 공자는 가운데 문에서 나온 고로 중도를 위주로 한다. 이것은 삼성이 각각 일도를 위주로 한 것이요, 나의 도는 삼도를 합일하여 일도를 이루었나니 비유컨대 사람 몸이 좌우중이 갖추어진 것과 같다.”(제6권/p.9)

금강대도-유·불·선은 길항관계
이러한 주장들은 금강대도에서 다음과 같이 관점을 통해 해석된다.
첫째는 대도의 이론적 구축의 요소로서의 측면으로 본 유불선에 대한 수용의 태도이다.
금강대도는 ‘영대(靈臺)’, 혹은 ‘원신(元神)’과의 일치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즉 “심신을 수련해 하나로 복귀한다는 것은 유불선 삼교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것이다 (…) 비유하자면 ‘세 배에서 한 달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며, 금강대도에서는 이 삼교의 심성배합론을 모두 이용하여 ‘자수심성(自修心性)’ 함으로써 도를 깨닫는다” 는 것이다.

둘째는 유불선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현실적 위치에서의 유불선에 대한 평가의 태도이다.
금강대도는 유불선의 존재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제는 삼교의 운도가 다 지나감으로써 그 제자들 가운데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가 드물게 되어, 이 삼교의 가르침을 통합한 금강대도가 완전한 교법과 어김없는 실천으로써 중생구제의 사명을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서 금강대도와 유불선의 연관관계가 상극의 관계가 아니라, 긴장관계를 전재한 길항관계(拮抗關係)라고 파악할 수 있다.

금강대도에서 오중(午中)의 시간은, 즉 운도적으로 본다면 선천(先天)이 끝나고 후천(後天)으로 교역(交易)되는 시대를 뜻한다. 여기서 교역이라는 뜻은 다른 신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개벽(開闢)과는 매우 다른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이재헌은 금강대도의 오중운도와 흔히 인구에 회자되는 여타의 한국 신종교의 개벽관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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