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배> 오딧세이 (3)

▲ 이정식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전 CBS 사장
1984년 9월 어느 날, 제주대의 양중해 교수가 관덕정 근처에 있던 제주 MBC에 들어왔다. 양 교수는 당시 프로그램 출연 차 일주일에 한번 가량 방송국에 들렀다. 제주 MBC엔 양 교수가 과거 오현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할 때의 제자인 아나운서 출신 김순두 씨가 라디오 편성부장을 하고 있었다. 김순두 씨는 제주 최초의 TV 아나운서로 제주에선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이다.

김 부장은 편성국으로 들어오는 양중해 교수를 반갑게 맞았다. 출연에 앞서 양 교수와 차를 한잔 나누고 있는데, <떠나가는 배>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
양 교수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저거 내 노래야.”
순간 김 부장은 귀가 쫑긋해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내 노래라니요?”
“저거 내가 작사한 거야. 내가 쓴 거지.”

김 부장은 존경하는 은사가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 놀라웠다. 가곡 <떠나가는 배>는 오래 전부터 방송에서 자주 들려주던 것이고, 작사자의 이름도 그저 무심코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김 부장은 재차 물었다.

“어떻게 된 이야기입니까?”
양 교수는, “6.25 때 피난민들은 물론이고 문학인들도 많이 제주에 왔었잖나? 그 분들이 제주를 떠나가는 모습을 서부두에서 늘상 보면서 그 때의 감상을 쓴 것이지.”라고 말했다.

▲ <떠나가는 배> 작사자를 바로잡은 김순두 씨
전쟁 당시 제주에는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소설가 계용묵(1904~1961) 씨를 비롯, 문인들도 40명 가까이 와 있었다. 미술가 이중섭씨(1916~1956)도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서귀포에서 가족과 어렵게 살다 부산으로 돌아갔다.

“왜 아직까지 말씀을 안 하셨어요? ”
“그거 내가 쓴 거니 내꺼지 뭐, 굳이 이야기할 게 뭐 있어.”
김순두 씨는 양중해 시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양 선생님은 선(善)하기가 이를 데 없는 분이었습니다. 평생 어느 누구에게도, 지나가는 강아지에게도 욕 한번 한 일이 없는 분이었지요. 문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직접 대응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성품이었기 때문에 <떠나가는 배>가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방송과 음악 교과서 등에 소개 되어왔는데도 자신의 작품이란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내놓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김 부장과 함께 있을 때 <떠나가는 배>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바람에 그같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김 부장은 그 자리에서 평소 가깝게 지내던 서울 MBC 본사 FM부 박경식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차장은 당시 FM에서 오전 11시부터 하는 ‘나의 음악실’ 담당 피디였다. 박 차장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 후 양 시인은 서울 MBC FM의 ‘나의 음악실’ 프로그램에 초청되어 이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어 박 차장은 중앙의 문교부에, 제주의 김 부장은 제주도 교육청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작사자를 바꾸는 작업에 들어갔다.

▲ 박목월 작 ‘양중해 씨를’
김 부장은 다른 한편으로 이 사실을 기정 사실화 하기 위해 자신의 기획으로 그해 1984년 11월 5일 제주시민회관에서 “제1회 제주 MBC 가곡의 밤”을 열었다. 성악가가 노래를 하기에 앞서 사회자가 <떠나가는 배>의 작사자는 바로 제주도민들이 존경하는 시인인 제주대학의 양중해 교수라고 소개했다. 관객들은 전부 기립하여 양중해 시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 후 음악 교과서를 비롯, 모든 자료에 작사자의 이름이 양중해로 바뀌게 되었다. 김 부장의 적극적인 성격이 이뤄낸 결과였다.

한참 뒤 어느 날, 방송국에 온 양 교수가 김 부장을 손짓해 불렀다.
“자네 이리 좀 와 봐.”
“예, ------”
“요즘 내 수입이 괜찮아. 원고료가 꼬박 꼬박 들어와.”

김 부장 덕에 저작권료를 받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였다. 김순두 부장은 그 후 제주 MBC에서 아나운서실장, 편성국장, 보도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KCTV 제주방송 사장을 지냈다.

▲ 양중해 시집‘한라별곡’(1993)
목월이 시(詩)로 그린 ‘시인 양중해’

양중해 시인을 아는 제주의 많은 분들은 그를 가리켜 제주의 마지막 선비였다고 회고한다. 양 시인을 그처럼 기억하는 것은 그분이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전 생애를 통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한다.

양중해 시인은 박목월(1916~1978) 시인과도 친분이 있었다. 양 시인을 문단에 추천한 것도 목월이었다.(양 시인은 1959년 박목월, 유치환 두 시인의 추천으로 <사상계>를 통해 정식 등단했다)
목월이 작고하기 전 해인 1977년 6월 어느 날, 양중해 시인이 도쿄대학으로 연구차 나가게 되었을 때, 목월 선생을 원효로 자택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때 목월은 대학노트에 있던 초고를 원고지에 옮긴 ‘양중해 씨를’이라는 제목의 시를 양 시인에게 주었다.

양중해 시인의 모습과 성품을 한 눈에 그려볼 수 있는 시이다. 1992년에 낸 양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한라별곡(漢拏別曲)>에 원고지를 찍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양중해 씨를
박목월

서귀포에는
유자(柚子)가 특산물.
유자처럼 얌전하고
유자처럼 말이 없고
그리고 늦가을 햇볕 속에
웃으며 익는 가난한 시인.

그의 미소
그의 안존한, 물같은 눈
다만 덕(德)이 넘쳐
시를 안으로 간직하고
다만 스승이래서
시인임을 삼가고.

나그네를 맞이하면
나그네를 안방에 앉히고
손님이 찾아오면
손님을 상좌에 모시고
벗이 오면 아랫목을 비워주고
적(敵)이 와서 만나자 세 번 절하고 물러서게 하고,

유자는
서귀포의 특산물.
유자에는 그분의 향취가 난다.
유자에는 그분의 시가 있다.
그리고
유자는 남쪽 하늘과 수평선과
바다위에 내리는 이슬로 자란다.
그리고 유자에는
그분의 향취가 난다.
유자 속에 그분이 있다.

▲ 화가 이중섭이 피난시절 살았던 서귀포의 초가집. 오른쪽 끝방에서 식구 넷이 살았다.
양 시인은 이 시를 받고 도쿄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듬해 한참 후에야 목월의 부음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양중해 시인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이 이 시에 다 담겨있는 것 같다.‘왜 떠나가는 배>의 작사자의 이름이 이 노래가 만들어진지 32년이나 지난 1984년에야 양중해로 바로 잡혀지게 되었는가?’‘왜 그렇게 오랜 세월을 흘려보냈을까?’성급하고 자신의 조그만 손해도 참지 못하는 요즘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 시가 그 이유를 어지간히 설명해 준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