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배>오딧세이 (2)

▲ 이정식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전 CBS 사장
<떠나가는 배>와 목월 이야기

제주문화원의 현태용 국장은 필자가 청주로 돌아온 후 필자에게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이메일로 보내왔다.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제가 양중해 선생을 모실 당시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박목월 선생은 1951년에 피난 와 제주시 칠성통에 있는 여인숙(동화여관?)에 방을 얻어 육지에서 같이 온 20대 초반의 문학소녀와 살았다. 소녀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찾아와 딸을 설득시켜 데리고 가게 되는데, 떠나기 전날 소녀는 제주에서 도움을 받은 목월 선생의 친구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게 된다.

생활이 어려운 터라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 바꿔 온 쌀로 손수 저녁을 지어 대접하였다. 다음 날 목월 선생과 그의 친구들이 부두로 전송을 나가게 된다. 소녀를 싣고 떠난 배는 점점 멀어지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목석처럼 서있는 목월 선생의 모습이 애달프고 처량하였다.

친구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마지막 남은 목월 선생과 양중해 선생이 돌아오는 길, 선술집에 들러 막걸리를 마시던 현곡(양중해) 선생이 시멘트 종이를 찢어 적은 시가 오늘의 가곡 <떠나가는 배>의 노랫말이다. 목월 선생은 그 후에 제주를 떠났다가 또 한 번 제주에 와서 제주대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제주의 서예가 현병찬 선생이 쓴 이 <떠나가는 배> 원시(原詩). 액자는 생전에 양중해 선생이 갖고 있던 것인데, 현재 서귀포시 안덕면 ‘카멜리아 힐’(회장 양언보)에 보관되어 있다. 제주 탑동해변공연장의 시비(詩碑)는 이것을 옮겨 새긴 것이다.

현 국장 말대로라면 유명 시인은 박목월이며 <떠나가는 배>는 목월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현 국장은 목월이 1951년에 여인과 제주에 왔었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부터 혼란이 생긴다. 1986년 이형기 씨가 펴낸 ‘박목월 평전·시선집 <자하산 청노루>’등에는 목월이 1954년 가을 애정도피처로 제주를 찾은 것으로 되어있다.

현 국장은 1999년부터 제주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원장이었던 양중해 선생을 가깝게 모셨던 분이다. 양 시인이 돌아가시기 한해 전인 2006년 <떠나가는 배>가 목월 시인과 관련이 있다며 그와 같은 이야기를 자신에게 직접 들려주었다고 했다.

<떠나가는 배>는 가곡으로 1952년 7월에 작곡되었으므로 목월이 1951년에 제주에 왔다면 <떠나가는 배>의 시작(詩作) 동기로서 이야기가 연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1954년이라면 이야기가 사뭇 달라진다. 목월은 1954년 제주에 갔을 때 반년 이상 머물렀다. 이 기간 제주대 등에서 강사노릇을 했다. 필자는 목월이 6.25 전쟁 기간(1950. 6~1953. 7)중 제주에 머물렀다는 기록을 아직 찾지 못 하였다. 1954년의 제주행에 대해서는 기록과 증인이 있다.

이형기 씨의 책에는“목월이 1951년 1.4 후퇴 때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경주에서 가까운 대구로 피난을 갔고, 공군종군문인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출판 일 등으로 서울서의 생활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54년 이전에 제주에 간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이 책에 없다.

▲ <떠나가는 배> 액자 등 양중해 시인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카멜리아 힐에서 양언보 회장(가운데)을 취재중인 필자.
단편적이긴 하지만 시인 양명문 선생의 유고 수필집 <무엇이든 사랑할만하며>(샘터사, 1988)에‘목월과의 교유’라는 글이 한편 있는데, 여기에도“목월이 1.4후퇴 때 대구로 내려가 공군에 종군했으며, 여기서 창조사라는 출판사를 내고 부지런히 뛰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박목월과 가깝게 지낸 작곡가 김성태씨도 6.25 전쟁 중 대구에서 목월과 자주 만났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봉선화에서 무덤까지> 지철민, 심상곤 공저, 무궁화사,1973] 여러모로 살펴 보건대 그가 전쟁기간 중 여인과 제주에 갔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무래도 이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나올 가곡 <이별의 노래> 편에서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이별의 노래>와 <떠나가는 배>가 서로 관련이 있으며 시로 읊은 대상이 같은 여인이라는 이야기가 문단에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시(詩)가 먼저라는 증거

떠나가는 배의 경우 시가 먼저인가 곡이 먼저인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고 했는데, 앞서 조명철 원장의 증언도 있었지만, 원시(原詩)를 보면 시가 먼저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원시는 제주시 탑동해변공연장 안의 시비에 적혀있다.

떠나가는 배(원시)
양중해

떠나가는 배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못할
님 실은 저 배야.

야속해라.
날 바닷가에 홀로 버리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터져 나오라, 애달픈 추억이여!
한의 바다여!
아련한 꿈은 푸른 물에
아프게 사라지고
나만 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수심뜬 바다를 지키련다.

저 수평선을 향하여
떠나가는 배.
설운 이별.
님을 보낸 바닷가를
넋 없이 거닐면
미친듯이 울부짖는 고동소리.
님이여 가고야 마느냐.

이처럼 노래 2절에 해당되는 중간부분이 지금의 노랫말과 상당히 다르다. 만들어진 곡에 가사를 붙였다면 1, 2, 3절의 운율을 맞췄을 것이므로 시가 전체적으로 이런 모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가 먼저 지어진 것이 확실하다’는 조명철 원장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조명철 원장은 그의 글 ‘시인 양중해의 삶과 예술’에서 <떠나가는 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싣고 거친 물결을 헤치며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다 안타까워하며 넋없이 바닷가를 서성이는 모습. 그것은 애인을 보냄일 수도 있고, 친구를 보냄일 수도 있고, 혹은 배를 타고 떠나는 모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은 배는 뱃고동을 울리며 떠나지만 선생(양중해)은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고향을 지키려는 결의를 다진다. 그러기에 평생을 고향에 붙바기로 살면서 제주적인 정서로 시를 쓰는 애향의 화신이라 할 것이다.” <삶과 문학> (2002년 3월)

조 원장은 양 시인을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고향인 제주를 지키려는 애향의 화신’으로 표현했다.

20년만에 부활한 <떠나가는 배>

사실 <떠나가는 배>는 20년 가까이 잊혀져 있었다. 이 노래는 1952년 가을, 부산에서 열린 ‘젊은 작곡가의 밤’ 음악회에서 테너 안형일 씨가 처음 불렀다. 이 날 변훈의 또 다른 신작(新作) <명태>도 함께 발표되었는데, <명태>가 혹평을 받으면서 함께 잊혀졌었다.

변훈이 이때의 충격으로 작곡가의 길을 포기하고 외교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명태>편에서 한 바 있다. 아무튼 196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에 들어와 우리 가곡이 본격적으로 ‘붐’을 일으키면서 <떠나가는 배>와 <명태>도 부활되었다. 두 노래는 그 후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일약 유명가곡이 된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