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떠나가는 배

양중해 작시 변훈 작곡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임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터져나오라 애슬픔 물결위로 한된 바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애끓이 사라져 나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수심뜬 바다를 지키련다.

저 수평선을 향하여 떠나가는 배 오! 설운 이별.
임 보내는 바닷가를 넋 없이 거닐면 미친듯이
울부짖는 고동 소리 임이여 가고야 마느냐.

비행기 여행이 대중화된 요즘 시대에서 볼 때, <떠나가는 배>는 그야말로 옛날식 이별의 상징이다. 옛 사람들은 ‘점 점 점’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는 배를 바라보며 이별의 슬픔을 꼴딱 꼴딱 삼켰다. 그런 ‘부두의 이별’이 그렇게 먼 옛날 얘기도 아니다.

<떠나가는 배>의 무대 제주도

▲ 양중해 시인
가곡 <떠나가는 배>의 무대가 제주도이며 작사 작곡된 때가 한국전쟁 중(1952년)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제는 인터넷에서 ‘떠나가는 배’를 치면 수많은 자료들이 나온다. 그 중에 가곡 <떠나가는 배>가 쓰여지고 작곡된 스토리도 여러 종류 나와 있다.

어떤 것은 비교적 그럴듯하게 정리되어있고, 어떤 것은 그저 들은 이야기를 옮긴 정도다. 어느 것도 이 노래를 이해하는 데는 제법 도움이 된다. 진실의 문제가 그토록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나의 <떠나가는 배>에 대한 관심은 실은 작사자인 양중해 시인(1927 - 2007)의 세 권의 시집에 그의 가장 유명한 이 시가 실려져 있지 않은 이유 때문에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2010년 어느 봄날, 나는 <떠나가는 배>가 실려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양중해 시인의 시집 들을 찾고 있었다. 양 시인은 생전에 <파도>(1963년), <한라별곡>(1992년), <수평선>(2003년) 등 3권의 시집을 펴냈다. 다작(多作)의 시인은 아니다.

세 권을 모두 구해 읽어보았다. 나같은 문외한의 눈에도 훌륭한 시들이 많았다.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진솔한 감성이 시에 잘 스며들어 있다고 감히 평하고 싶다.

▲ 제주 산지등대와 제주항.
그런데 그 세권의 시집을 아무리 뒤적여도 <떠나가는 배>는 보이지 않았다. 왜 없을까?
나는 이 의문을 풀기위해 제주의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 보았다. 답은 어느 것도 분명치 않았다. 대체로 ‘시집에 안 실린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다.’ ‘나름대로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하고 말했다. 어떤 이는 “일부 시인들의 경우 노랫말로 쓴 것은 자신의 시에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시로 쓴 것이 아니라 곡에 가사를 붙인 것이기 때문에 시집에 넣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이었다.

하긴 작곡가 변훈 사후인 2004년 성악가 구희용씨가 펴낸 <변훈작곡집>에는 ‘당시 변훈 선생이 제주 항에서 피난민들의 한을 실어나르는 배를 보며 작곡의 악상을 떠올린 후 같은 학교에 재직중이던 국어교사 양중해 선생에게 <떠나가는 배>의 가사를 부탁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곡을 먼저 만들어 놓고 가사를 부탁한 것 같은 느낌이다.

또한 양중해 시인의 시작(詩作) 동기에 대해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가 있었다. 많이 알려진 대로 양 시인이, ‘한 유명 시인의 사랑하는 여자와의 제주부두에서의 애절한 이별 장면을 목격하고 시상(詩想)을 얻어 쓴 시가 아니고, 6.25 전쟁 기간 중 모슬포 훈련소에서 전투에 투입되기 위해 육지로 떠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쓴 시’라는 얘기가 그것이다.

이야기들을 듣고 보니 <떠나가는 배>와 관련한 의문점들이 대충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 정리 되는것 같았다.

첫째, 왜 시집에 실려있지 않은가?
둘째, 시가 먼저 인가, 곡이 먼저인가?
셋째, 유명 시인의 연애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

▲ 필자와 조명철 원장 등(좌로부터 현태용 국장, 조명철 원장, 필자, 고옥주 시인)
수필가 조명철 원장과의 통화와 만남

마침내 8월 초, 이 시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내용을 가장 잘 알고 계신 분 중 한 분과 연락이 닿았다. 2002년 양중해 시인이 생존해 계실 때 <삶과 문화>라는 잡지에 <시인 양중해의 삶과 예술>이란 글을 쓴 제주의 저명한 수필가 조명철 씨다. 현재 제주문화원장이시다.

조 원장께 전화로 나에 대한 소개를 하고 궁금한 내용들을 물어보았다.

왜 세 권의 양중해 시집에 그의 가장 유명한 시(詩)인 <떠나가는 배>가 실려있지 않은지요?
조 원장 : 저도 양 선생께 그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제 질문에 대해 “시인으로 등단하기 한참 전에 쓴 것이기 때문에 그냥 놔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양 시인은 1959년 박목월, 유치환 두 시인의 공동 추천으로 <사상계>를 통해 정식 등단했다.)

이 노래는 시가 먼저입니까, 곡이 먼저입니까? <변훈가곡집>에는 6.25 전쟁 당시인 1952년에 변훈 선생이 곡을 만든 후 양 선생께 가사를 부탁한 것처럼 나와 있습니다.
조 원장 : 제주 제일중학교 국어교사 시절 자신이 쓴 <떠나가는 배>를 음악 교사였던 변훈 선생이 보고 ‘곡을 붙이면 좋겠다’고 하여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양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시가 먼저입니다. 시에 곡을 붙인 것이 확실합니다.

이 시는 한 유명 시인이 사랑하던 젊은 여자를 제주항에서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는 애달픈 장면을 양 시인이 목격하고 쓴 것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조 원장 : 저도 그런 이야기를 언젠가 들었는데,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양중해 선생으로부터 한번도 그런 이야길 들은 적이 없습니다. 작곡가 변훈 선생은 6.25때 제 주에 왔다 갔고, 그 유명 시인은 전쟁 끝난 한참 뒤에 제주에 왔습니다. 연대가 맞질 않습니다.

필자는 태풍 ‘곤파스’가 올라오고 있던 2010년 9월 1일 제주에 가서 조명철 원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위와 같이 전화 통화를 정리한 내용을 보여드리고 수정할 곳이 없는지 물었다. 잘 정리되었다고 하셨다. 조 원장을 만나는 자리에는 제주문화원의 현태용 국장이 함께 있었다. 현 국장도 수필가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과 관련해 현 국장의 설명은 조금 달랐다.
[<떠나가는 배> 오딧세이(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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