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고백] 돈으로 '교장직'을 샀습니다 2004-01-09 20:52:52, 조회 : 177, 추천 : 0
2004.1.9 (금) 12:19 문화일보 (나의 고백 - 61세의 초등학교장)교육자로서 촌지거부운동을 벌였던 제가 승진을 위해 금품 상납을 했던 경험을 털어놓으려니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그간의 마음 고생을 위로받고 싶군요.저는 전라남도에서 40년째 초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는 권철진(61 ·가명) 입니다. 지난해 교감에서 교장으로 승진하는 과정에서 생전 처음 수백만원의 금품을 ‘상납’ 했습니다. 지난 65년 2월 S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교단에 선 이래 촌지나 인사청탁 거부운동을 벌여온 저이지만, 현직에 몸을 담고 있는 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 있음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일선학교 교장에 대한 인사권은 각 시·군 교육장이나 시·도 교육감이 쥐고 있습니다. 자신이 성실하고 부지런하다고만 해서 교장이 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돈으로 교 장을 산다’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교사는 교감이나 교장에게, 교감이나 교장은 교육장이나 교육감에게 ‘상납’을 통해 승진할 수 있는 먹이사슬구조를 저 역시 두 눈 질끈 감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대학 졸업 후 모교인 전남 N초등학교로 발령 받아 처음 교단에 섰을 땐 이런 일들이 교육현장에서 벌어지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평교사였던 제가 어느새 교감이 되고, 이어 교장이 될 시기가 다가오자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저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복잡해졌습니다. 촌지나 인사 청탁 등의 문제들은 보다 구체적인 저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죠.지난 94년 순천에 있는 한 초등학교 교감으로 부임했을 때의 경험을 얘기해야겠습니다. 당시 저는 교육자로서의 소신과 원칙, 그리고 현실이라는 문제를 놓고 한동안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교사 한 분이 인근 학교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날 시내에서 오래간만에 만나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었지요. 술이 몇 순배 돌자 그 교사는 “같은 학교 후배교사는 이미 부장교사가 됐는데 진작 부장을 했어야 하는 나는 아직 승진을 못하고 있다”며 학교장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더군요.‘뭐라고 얘기해줘야 할까. 그까짓 부장교사쯤 안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해줘야 하나….’ 그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그러나 저는 고민 끝에 “부장교사를 해야 할 연한이 됐다면 지금 교육현실에선 교장, 교감에게 술 한잔 대접하면서 봉투 건네 주는 게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해결방법이 아니겠느냐”고 조언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교사는 부장교사가 됐고, 원래 있던 부장교사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교사의 인사권은 교장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일부 교사는 빠른 승진을 위해 철새처럼 학교를 옮겨다니며 기회를 엿보기도 합니 다. 아니면 평소 교장에게 금품을 제공하면서 살 길을 찾기도 하지요. 그러니 촌지를 애교(?) 정도로 생각하는 교육계의 관행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이겠습니까.96년 저는 4학급밖에 되지 않았던 초등학교에서 80학급에 직원이 120명이나 되는 큰 학교로 반강제 발령이 났습니다. 초임 교감 시절이었는데 “촌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교사의 촌지 부스러기를 교장이 얻어먹지 말아야 한다”고 공공연히 입바른 소리를 하고 다닌 것이 화근이었죠. 순천 시내 교장단이 들고 일어나 교육? 恙“? 저의 좌천을 건의했습니다.그러나 교육장은 “그 사람 참, 50세가 넘은 사람이 아직 철이 덜 들어서…”라며 도리어 전남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학교로 보냈습니다. 소위 물 좋은 곳(?)에서 제대로 촌지맛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으로 판단한 것이죠.소문대로 ‘그 맛’을 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부임 첫 해 추석, 상상을 초월하는 촌지가 들어왔습니다. 학부모가 교사에게 촌지를 주면 교사들은 이중 일부를 교감, 교장에게 상납하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교감인 저에게 들어온 촌지만 해도 1000만원에 육박했습니다.이래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두번째 명절인 설을 앞두고는 각 학년 부장교사들에게 “촌지를 주고 받는 관행을 없애자”고 설득했다가 실패했습니다. 부장교사들은 물론 학부모들까지도 “촌 놈 티 낸다”며 비웃었죠. 차선책으로 며칠 뒤 80여명의 교사를 모아놓고 비상회의를 열어 “제발 더이상 촌지 상납은 그만두자 ”고 읍소했습니다.그랬더니 그동안 교사 개인이 교감, 교장에게 들고 오던 돈봉투는 학년별로 하나씩 봉투를 만들어 상납하는 ‘학년봉투’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바뀌더군요. 촌지를 끝까지 끊을 수 없다는 교 사들의 항변이었던 셈이죠. 그로부터 4년 뒤 다른 학교로 갈 때 까지 저는 ‘학년봉투’를 받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촌지를 ? 騁弩?때는 아이들을 위해 동화책을 사서 도서관에 기증하는 등 나름대로 차선책을 찾았습니다.지난 40년간 교육자로서 제 모습을 되돌아보면 머리와 가슴은 참교육에 대한 원칙과 소신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현실은 그런 저를 용납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교직생활 내내 갈등과 번민 속에서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촌지거부운동을 벌였던 제가 승진을 위해 금품 상납을 할 때도 저는 이같은 갈등으로 몸부림쳤습니다. 교장이 되어서 제가 맡은 학교만큼은 촌지 없는 깨끗한 학교로 만들고 싶었고, 평소 생각 해온 여러가지 교육개혁 방안들을 몸소 실천해보고 싶었습니다.그러나 결과적으로 저는 오히려 교육계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상납과 촌지 문화를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해버렸습니다.그리고 부장교사나 교장, 교육장, 교육감이 되는 것이 지상목표 인 양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육현장의 왜곡된 현실을 몸소 실천한 꼴이 돼버렸다는 것이 못내 부끄럽고 수치스럽습니다. 정리〓이현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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