年年歲歲花開同(년년세세화개동)
  歲歲年年人不同(세세년년인불동).
  ‘해마다 피는 꽃은 같건마는,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아니하네.’ 인간사 덧없음을 노래한 이 유명한 시구는 당나라 시인 유희이(劉希夷)의 칠언고시 ‘代悲白頭翁(대비백두옹·흰머리를 설워하는 노인을 대신하여)’ 가운데 두 구절입니다.

  ‘年年歲歲, 歲歲年年’이라는 이 여덟 글자는 오랜 세월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왔지만 작자는 이 몇 글자 때문에 비명횡사(非命橫死)하는 딱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약관 25세에 진사에 급제 할만큼 뛰어났던 유희이는 평소 술을 몹시 즐겼는데 어느 때 시상(詩想)에 골몰하던 끝에 위의 두 구를 얻어 크게 탄복합니다. 유희이는 회심에 차 “옳다, 이 여덟 자로 좋은 시를 짓자”고 무릎을 치는데 이를 본 장인 송지문(宋之文)이 그 글을 탐내 자신에게 줄 것을 청합니다.

  하지만 글이 너무나 아까웠던 유희이가 끝내 거절을 하자 화가 난 장인은 사람을 시켜 흙 포대로 사위를 쳐죽이고 맙니다. 결국 유희이는 글자 몇 자로 하여 아까운 나이로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피는 꽃은 같건마는 사람은 같지 아니하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견했던 모양입니다.

  꽃이 피고 지듯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나 생명이 없는 것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성장과 변화를 거듭하다 늙어 죽고 하늘을 나는 새도, 숲 속을 헤매는 짐승도, 바다 속 물고기도 날마다 조금씩 변하다 죽습니다. 들녘의 풀도, 산비탈의 나무도 변화를 거듭하다 때가 되면 결국은 말라죽고 맙니다.

  생명이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 돌도 흙도, 바람도 구름도 똑같은 형상으로 그대로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모든 것은 매 순간순간 변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늦고, 길고 짧은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꽃이 해마다 같이 핀다한들 지난해 그 꽃은 아닐 터입니다.

 기원 전 1100년경 중국 은(殷)나라를 창건한 탕왕(湯王)이라고 있었습니다. 키는 9척 장신이요, 흰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르고 뾰족한 머리와 여섯 마디의 팔을 가지고 있으며 몸의 한쪽이 다른 쪽보다 훨씬 컸다고 기록에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탕왕이 나라를 잘 다스려 은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뤘는데 그의 치세(治世)의 요체는 변화를 꾀하는 것이었습니다. 탕왕은 놋대야에 글자를 새겨 놓고 아침마다 세수를 할 때면 물 속에 비친 글귀를 외면서 ‘좋은 정치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글인 즉 슨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구일신 일일신 우일신)’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대가 날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면 날 마다 날마다 새롭게, 또 새롭게 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3천여 년이 지난 옛날 이야기이지만 탕왕은 중국 역사상 훌륭한 성군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입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자는 살아 남고 그렇지 못한 자는 낙오합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요, 변함없는 세상이치입니다.

  오늘 우리사회에 소용돌이치는 혼란과 온갖 갈등현상은 절실한 변화의 몸부림이요, 도도한 역사의 흐름입니다. 그 거대한 물줄기를 누구도 거스르지 못합니다. 갈등과 혼란은 일시적일 뿐 변화는 계속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디지털시대에 백년 전의 낡은 유성기(留聲機)를 틀어놓고 흘러간 옛 노래에 젖어 새 노래에 귀를 막고있다면…. 세상은 많이 변했고 또 놀랍게 변하고 있습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삶의 지혜요 미덕이 되고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 입니까.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아침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고 차가운 머리로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해마다 사람도 같지 아니하고 피는 꽃도 다릅니다.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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