郡, 새로운 사적비·봉분 확대·동상 건립 소문 없이
단재제전추진위 “국가적 위인 사회적 합의 거쳐라”

단재제전추진위 12일 일요일에 찾아간 단채 신채호 사당은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모습이었다. 그동안 며느리 이덕남 씨로 대표되는 유족과 고령 신씨 문중, 단재문화제전추진위원회, 청원군이 엇갈린 목소리를 내며 묘역 재정비사업이 난항을 겪어왔다.

선생의 묘는 수맥때문에 지난 세월동안 10여차례 무너져 내렸다고 주장하는 후손들에 의해 파묘된 후 임시 이장돼 가묘로 방치돼 왔다. 그러던 2007년 묘역을 성역화 하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문제는 사적비의 일부 내용에 오류가 있다는 이유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적비와 묘표비를 뽑아내고 고령 신씨 문중이 제작한 사적비로 대체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문중만의 뜻이었고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문중의 뜻을 따른 청원군의 실수였다. 유족인 이덕남 씨는 기존 사적비와 묘표비의 역사적 의미를 내세워 제자리로 돌릴 것을 요구했고, 단재문화제전추진위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결국 지난해 2월 이덕남 씨와 고령 신씨 문중 대표, 단재기념사업회, 단재문화제전추진위, 청원군 관계자 등 12명이 참석한 회의를 통해 유족과 단재문화제전추진위의 의견을 반영하기로 합의했다.

청원군은 지난해 12월 1941년 묘역을 정비하며 한용운 선생 등이 참여해 세운 묘표비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묘 우측으로 1972년 이은상·송건호 선생 등이 참여해 제작한 사적비를 다시 세웠다. 또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선생의 정신과 걸맞지 않게 큰 봉분도 절반가량으로 축소했고, 문중에서 제작한 사적비는 표면을 깎아내고 조선혁명선언을 새겨 넣기로 합의했다.

이덕남 씨, 제막일 연기에 합의
이제는 다함께 단재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지켜나가는 일만 남은 줄 알았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청원군과 유족이 단재문화제전추진위와 상의없이 동상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

김승환 문화제전추진위 공동대표는 “최근 군에서 동상에 들어갈 문장을 추진위가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고서야 동상을 제작하는지 알았다”며 “소식을 접하고 급히 회의를 열었다. 동상을 세우면 안 된다는 것이 추진위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밝혔다.

지난주 시어머니인 박자혜 여사와 단재 선생과의 ‘혼인관계 존재 확인의 소’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일시 귀국한 이덕남 씨는 청주의 한 찻집에서 단재문화제전추진위와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승환·허원 공동대표는 “단재 선생의 동상은 위인이기 때문에 국민적 지지와 합의를 거쳐 진행해야 한다. 또한 단재 선생과 박자혜 여사의 동상은 철저한 고증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이 씨는 추진위의 의견에 공감하며 당초 10월 17일(박자혜 여사의 기일) 예정이었던 제막일을 내년 2월 21일(신채호 선생 기일)로 연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기간동안 충분히 고증 등의 절차를 진행하자는 의미였다. 그리고 17일 동상을 제작 중인 박태순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신채호 선생 동상 이미 세워져
하지만 12일 찾은 신채호 선생 사당에는 이미 제작된 신채호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청원군에 문의한 결과 선생의 동상은 박태순 작가에 의해 지난 6월에 세워졌으며, 현재 진행 중인 박자혜 여사의 동상이 완성되는 대로 합상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이 이만큼 진행되는 동안 단재문화제전추진위는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 공동대표는 “지난해 2월 연석회의에서 상징물 등 추후에 설치되는 것들에 대해 모두의 협의를 통해 진행하기로 합의해 서명까지 했다”며 “동상은 품격과 사상, 철학, 개인적인 풍모까지 담아내야 하는데 이렇게 졸속으로 처리할 순 없는 일”이라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이로 인해 그동안 같은 입장에서 일을 진행해왔던 단재문화제전추진위와 유족간의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이덕남 씨로서는 시부모의 부부관계가 법적으로 회복되지 않은 시점에서 청원군이 시어머니를 포함한 부부의 동상의 세운다고 하니 환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그렇다고 해도 청원군이 조선혁명선언을 세우기로 해놓고 약속도 이행하지 않은 채 공동 협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유족과의 의견조율 만으로 동상 제작을 진행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나라, 매국노에 관대하고 애국지사에 야박하다”
신채호 선생 박자혜 여사의 며느리 이덕남 씨

2004년 위암 말기판정을 받고 북경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았음에도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법적 부부로 인정받지 못한 시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다.

청주의 한 찻집에서 만난 이 씨는 “매국노의 땅은 손자 대에 와서도 찾아주는 국가가 애국지사를 어디까지 끌어내리려는지 모르겠다”며 “유가족이 이야기하기 전에 해방된 조국이알아서 해줬어야 하는 일”이라고 분함을 감추지 않았다.

신채호 선생은 2008년에서야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국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선생의 부인이자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박자혜 여사는 3·1운동 직후 간호사들로 구성한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만들어 간호사 동맹파업을 주도하고 만세운동에 나섰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후 갖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박자혜 여사는 중국 북경으로 넘어가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언론보도와 여러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밝혀졌지만 대한민국 법원은 둘의 부부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씨는 지난해 서울법원에 ‘혼인관계 존재 확인의 소’를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으로부터 각하당했다. 이유인 즉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망자의 부부관계를 성립시켜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해석이다. 당시 이 씨는 이에 대해 “판사가 역사의식이 없다”고 비판하면 항소를 준비했다. 그리고 오는 17일 항소심이 열린다. 이 씨는 “최근 몸이 더욱 좋지 않아 증거자료를 완벽하게 확보하지 못했다.

이번 항소심에서는 재판을 미뤄달라고 것을 요청할 계획”이라며 “다음 재판에서 충분한 증거자료를 통해 반드시 법적인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자혜 여사는 지난해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가 공동으로 선정하는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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