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사후 진가 드러나 방방곡곡에 메아리치다

▲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전 CBS 사장
“용하가 간 지 벌써 7년이 되는구나!
우리도 가난하지만 저는 너무도 가난하여 약 한 첩 제대로 못 써 보고---
하늘을 지붕 삼아 주소도 없는 움막 속에서 숨졌으니---
아! 저의 외로운 넋을---
그렇게 즐기던 술 대신 따뜻한 사랑의 숨결로 위로하여 주고저---
여기 저가 남긴 아름다운 마음의 노래를 묶어 <보리밭>이라 이름하여 펴 내고자 한다.
1972년 3월 1일 김 대 현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1922~1965)가 세상을 떠난지 7년 후 세광출판사에서 펴낸 ‘윤용하 작곡집’ <보리밭>에 그와 가까웠던 작곡가 김대현(1917-1985)이 쓴 머리글이다.
김대현은 해방 전인 1943년,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 시절 윤용하와 만나 음악활동을 함께 했는데, 나이로는 김대현이 형뻘이었으나 작곡 등에 있어서는 서로 호흡이 잘 맞는 음악적 동지였다.

▲ 작곡가 윤용하 ▲ 시인 박화목
<보리밭>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가을, 피난지 부산에서 시인 박화목(1924-2005)과 작곡가 윤용하가 ‘후세에 남길 수 있는 훌륭한 가곡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해 만든 작품이다. 고향이 같은 황해도였고 해방 전 만주에서 생활했던 경험도 같았던 두 사람은 전쟁 전 서울에서부터 가곡 작곡 관계로 아는 사이였다.

박화목은 해방 후 공보처 서울방송국(현 KBS중앙방송)에서 편성과 직원(프로듀서)으로 일했다. 당시 그의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이 새 가곡 보급 운동이었다. 해방 직후여서 우리말로 된 노래도 많지 않을 때였다. 가곡이 될 수 있는 시를 시인에게 청탁한 후 그것을 작곡가에게 나눠주고 작곡을 의뢰하는 형태였다. 이 무렵 윤용하가 방송국에 찾아왔다. 그에게도 작곡 일이 주어졌다. 박화목은 1947년 초여름 윤용하를 처음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윤용하는 이후, <민족의 노래>, <광복절의 노래> 등 훌륭한 국민 가곡들을 작곡했다.

두 사람은 전쟁 중 부산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자주 어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윤용하의 제의로 박화목이 시를 썼다. 떠나온 고향의 그리운 정경을 듬뿍 담은 <보리밭>. <보리밭>은 강한 서정성과 더불어 허무의 세계가 담긴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이 노래에서 우리는 우리민족 공통의 짙은 애수(哀愁)를 느끼는 것이다. 노래는 1년 후인 1952년 가을, 전시 작곡가 협회 주최로 이화여대 가교사 강당에서 열린 ‘신작가곡발표회’에서 치과의사였던 바리톤 김노현이 관객 앞에서 처음 불렀다.

보리밭
박화목 작시, 윤용하 작곡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 송계 박영대 화백의 작품 ‘보리밭’. 박영대 화백은 충북 청원 출신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보리작가로 꼽히는 분이다.
- 비극적인 최후 -
윤용하는 평생을 지긋지긋한 가난과 고독 속에서 살았다. 부산 피난 시절부터 서울에서 숨질 때까지 줄곧 끼니를 걱정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박화목은 그가 쓴 <윤용하 일대기>(범우사, 1981)에서 “그는 체념이 몸에 배인 낙관주의자인 듯 싶었다”고 말했다. 박화목은 휴전 다음해인 1954년, 이해 12월 개국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에 들어가 1970년까지 교양부장, 편성부장 등을 지냈다.

윤용하와 그의 가족이 살던 서울의 남산 아래 필동 단간 셋방에 가 보았던 김대현씨는 “그 방은 북간도(北間島) 일본 헌병대의 감방만큼이나 침침했었어요”라고 당시의 처참했던 윤용하의 생활을 이야기했다.(에피소드 한국가곡사, 심상곤·지철민 공저, 가리온, 1980) 그는 43세를 일기로 부인과 어린 두 남매를 남기고 갔다.

윤용하의 사인은 간경화증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영양실조였다. 그가 세상에 남긴 예술적 업적으로 볼 때 그러한 비참한 죽음은 매우 불공평해 보인다. 지금 같으면 저작권료 등으로 최소한의 생계는 꾸려갈 수 있었을 테지만, 당시에야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어려서부터 음악활동과 작곡을 했음에도 만주 보통학교(초등학교) 졸업이 그의 학력의 전부여서 사회생활에 제약이 많았던 것 같다.

윤용하는 보통학교 졸업 후 가족들이 다니던 만주의 한 외국인 천주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노래를 했는데, 당시 이 교회에 나오던 프랑스 영사 부인이 윤용하의 자질을 발견하고 오르간과 노래를 지도해 주었다고 한다.

그 뒤에 봉천 방송국 관현악단의 일본인 지휘자 가네코 씨로부터 화성학과 대위법 등을 배운 것이 그의 음악공부의 전부였다.

▲ 가수 문정선의 레코드 표지. 고고풍의 <보리밭>이 실려있다.
- ‘명품’ 한국 가곡중 하나 -
<보리밭>은 우리 가곡에 있어 명품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가곡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보리밭>이라는 노래 제목은 안다.

1970년대 대중가수 문정선이 고고리듬으로 불러 유행가로도 대 히트했다. <남촌>의 경우는 가곡과 가요의 작곡 내용이 완전히 다르지만, 가요 <보리밭>은 윤용하의 곡을 그대로 고고풍으로 리메이크 한 것이다. 가곡 <보리밭>보다 문정선이 부르는 <보리밭>이 한때는 더 유명했다.

한편, 박화목이 쓴 <윤용하 일대기>를 보면, 두 사람이 ‘후세에 남을 가곡을 만들자’고 약속하고 헤어진 날 밤 그는 고향의 보리밭 사이를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가 어렸을 때 고향의 보리밭의 이미지는 조국 땅의 얼굴과 같은 것이었다. 박화목은 이 시 속에서 우리 민족의 토착적인 애수를 표현해보고 싶었다.

박화목은 원래 이 시에 <옛 생각>이라고 제목을 붙여 윤용하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뒤 윤용하가 작곡한 악보에는 <보리밭>으로 고쳐 씌어 있었다. 박화목은 윤용하가 <옛 생각> 보다 <보리밭>이란 제목이 더 좋아서 바꾼 것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박화목은 음악공부를 한 적이 있어서 악보를 읽을 줄 알았다. 그래서 악보를 받아보고 두어 차례 직접 불러보았는데, 처음에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박화목은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작품을 대했을 때에는 그 훌륭함이 얼른 깨달아지는 것이 아닌 성 싶었다. 두고두고 발견되는 것이다. 바로 이 <보리밭> 작곡의 경우가 그것이었다. 오늘날 그가 작곡한 <보리밭>이 방방곡곡에 메아리 칠 줄 누가 알았으랴.”
안타깝게도 윤용하 사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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