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은 주차장, 뒤는 팬션마을에 갇힌 홍명희 문학비
제월대 고택 옆에는 현대식 주택...부조화의 극치

괴산군 괴산읍 제월1리 365번지는 벽초가 3·1운동 이후부터 북으로 넘어가기까지 살던 곳이다. 아버지 홍범식이 자결한 뒤 가세가 기울고 집안이 풍비박산나자 벽초는 생가를 팔고 제월리로 이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이 곳에는 벽초의 조카인 홍면씨 친척이 살고 있다. 생가와는 달리 단촐한 일자(-)형 기와집이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제월리로 들어서 제월교회 쪽으로 올라가니 한 눈에도 고택인 듯한 집이 한 채 있었다. 조카인 홍면 씨는 외출하고 없고, 부인 이덕진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벽초가 살던 고택은 동네사람들이 묘막이라고 불렀다. 홍범식 일가의 묘를 지키던 곳이라는 뜻이다. 이 집은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이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이 씨는 “문화재청에서 나와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보훈단체들의 반대 때문에 안됐다. 그동안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홍 씨 가족은 3년전 고택 뒤 터에 조립식 집을 한 채 지었다. 집이 좁아 이사를 했다는 것인데, 외양이 현대식이어서 앞 집 고택과는 너무 안 어울렸다. 벽면 전체가 흰색인 팬션 스타일이다. 한옥으로 지으려고 했으나 건축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 조립식으로 했다는 게 집 주인의 설명이다.

제월리 벽초 고택(앞)은 현재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했다. 뒤에 지은 현대식 주택은 고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고택이 더 망가지기 전에 하루빨리 문화재로 지정돼야 한다.

하루빨리 벽초의 고택도 문화재로 지정돼야 할 문화유산이지만 현재는 이 집이 일반가옥이기 때문에 같은 마당안에 건물신축 허가가 난 것. 이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씨로부터 더한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이 동네사람들로부터 빨갱이 집안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해 서울로 올라가 사는 동안 동네 할머니한테 집을 맡긴 적이 있다. 그랬는데 그 할머니와 아들 며느리가 고택안에 있던 책, 글씨, 액자, 뒤주, 그리고 귀중한 물건들을 팔아먹은 것이다. 우리는 전혀 몰랐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더 팔 물건이 없느냐고 찾아온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남아있는 게 없다.” 어려운 시절, 주인이 집을 피해있는 동안 홍명희 家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골동품업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됐다는 얘기다. 기가 막힌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생가로 이전 안되면 땅에 묻자는 의견도”
그리고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에는 제월대라는 조선시대 경승지가 있다. 조선 선조 때 유근이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이 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정자와 고산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실제 이 곳은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들이 모인다. 벽초도 제월대에서 낚시를 하고 소일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홍명희문학제추진위원회는 지난 98년 전국 문인들의 성금을 모아 이 유서깊은 제월대 광장에 벽초 문학비를 세웠다. 그러나 보수단체들이 문학비를 깨부수겠다고 하는 바람에 일단 자진철거한 뒤 2000년에 벽초의 월북과 부수상을 역임한 사실을 명기하고 다시 세우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현재 이 문학비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바로 뒤쪽에 제월대 팬션이 들어선데다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광장에 자동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서기 때문이다. 괴산군에서는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이곳에 문학비를 세운 것”이라면서 당초 용도가 주차장이었음을 강조하나 너무 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곳은 홍명희문학제의 주요 행사장인데다 지난 2007년 전국의 문인들이 통일노둣돌놓기 행사를 하며 통일을 염원한 곳이기도 하다.

도종환 시인은 “괴산군수는 지난해 홍명희문학제추진위원회와 문학제 행사를 같이 하자며 3000여만원의 예산을 주겠다고 하더니 국정원으로부터 전화 한 통 받고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버렸다. 괴산으로 전국의 문인들과 사람들을 모이게 해야 하는데 괴산은 오히려 배척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명희문학제는 올해로 15회째를 맞이한다. 추진위는 지난해 외부단체에 의해 추진되는 한계를 벗고 괴산군민들과 함께 하는 방안을 협의했으나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도 시인은 “괴산군과 협조가 되면 문학제를 괴산·청주에서 하고, 안되면 청주에서 하는 식으로 해왔다. 그러다 지난해와 올해는 예산이 적어 청주에서만 한다. 홀대받는 문학비를 생가로 옮기도록 해보고, 안되면 차라리 해체해서 땅에 묻자는 의견까지 있다. 너무 가슴아프다”고 말했다. 지난 9일 홍명희 문학비는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비를 철철맞고 있었다.

제월대 광장에 세운 벽초 문학비는 자동차와 팬션에 가려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벽초는 제월대에서 낚시를 하며 소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동그라미 친 부분이 문학비.

명문사대부 가문 ‘풍산 홍씨’
홍범식-명희-기문-석중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가계

홍범식-명희-기문-석중으로 이어지는 풍산홍씨 가문은 명문 사대부 출신이다. 일완 홍범식(1871~1910)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내부주사, 혜민서참서, 태인군수를 역임하고 금산군수가 됐으나 한일합방되는 것을 보고 자결했다. 그 만큼 대쪽같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아들 벽초의 월북과 북한에서 부수상을 지낸 이력 때문에 학계에서조차 다뤄지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00년 8월에서야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으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벽초 홍명희(1888~1968)는 휘문고보 교사, 외산고보 교장, 연희전문대 교수 등을 역임하고 시대일보 사장을 지냈다. 이후 충북최초로 괴산장날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해 옥살이를 했고,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으로 일경에 검거되기도 했다. 벽초는 일제하 민족운동의 지도자격인 인물이었으며 당대 최대의 장편소설인 ‘임꺽정’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홍기문(1903~1992)은 신간회 활동을 한 저명한 민속학자이며 국어학자이다. 대표작 ‘정음발달사’는 한글창제 및 반포 연도를 처음으로 밝혀낸 훈민정음의 독보적 연구서로 꼽히고, ‘조선문화총화’는 바둑의 유래·갓의 역사·잘못쓰는 한자와 우리말 등 역사·언어·문학·풍속 등을 담은 잡학사전으로 유명하다. 1947년 월북해 김일성대학 교수, 사회과학원장, 평화통일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벽초의 손자인 홍석중(1941~)은 현재 북한에서 저명한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벽초를 따라 월북한 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소설 ‘붉은 꽃송이’ ‘높새바람’ ‘황진이’ 등을 펴냈다. ‘소설 황진이’는 창비사가 주관하는 만해문학상(2004) 수상작으로 선정돼 북한작가로는 최초로 국내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홍 씨는 지난 2005년 7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 때 충북에서 간 작가들에게 특별히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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