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HID북파공작 설악동지회 충남북 대전지부장

‘3년간 지옥생활, 200만원 받고 전역’ ‘동료 살해상황, 평생의 상처’
작년 12월 국회 국방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안’ 통과시켜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특별한’ 이름의 법안이 상임위원회를 통과했다. 열린우리당 김성호의원이 의원입법으로 추진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률안’이 국방위를 통과한 것이다. ‘특수임무수행자’란 바로 ‘군번없는 군인’ 북파공작원들을 지칭한 말이다.
“사실상 우리는 국가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평생 먹고살 걱정없게 정착금주고 직장 마련해 준다고 유혹해서 끌고갔는데, 3년동안 목숨걸고 일한 대가가 겨우 200만원이었다. 집에 와보니 어머니는 그새 돌아가셨고, 동생들은 차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내 눈의 살기가 무서워서 피했다. 외부와 일체 단절되서 산속에서만 살다보니 시내버스 타는 것도 잊어버리고 대인기피증이나 우울증 때문에 자살하거나 정신이상이 생긴 동료들도 적지않다”

다부진 어깨에 후덥한 인상을 풍기는 HID북파공작 설악동지회 이재영(45) 충남북대전지부장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취재진이 이지부장을 수소문한 것은 청주에서 상영중인 영화 ‘실미도’와 청주출신 작가가 쓴 실화소설 ‘실미도의 증언’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희생자인 실미도 북파공작원을 되짚어보면서 정규 특수부대원 출신들의 모임인 설악동지회를 떠올린 것이다.

83년 물색조 만나 ‘설악개발단’ 입소 

청주가 고향인 이지부장은 83년 서울 남산에서 모병관(일명 물색조)을 만난다. “그때 태권도 운동을 하고 있는데 보안부대 직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감언이설로 유혹했다. ‘어차피 군대 한번 가는 것인데, 특수부대에 지원하면 사복입고 권총차고 생활할 수 있다. 나중에 제대할 때는 먹고살 걱정없게 정착금도 준다’고 하길래 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 산골짜기에 한밤중에 도착해보니 북한군복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말씨도 북한말이고, 싹 잡아돌리기 시작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강원도 산골짜기는 바로 속초였고 10명씩 팀단위로 이산 저산 나뉘어 땅굴같은 막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부대 명칭은 ‘설악개발단’이었고 1968년 북한 김신조 무장간첩단 사건직후 중앙정보부에서 대북 침투공작을 위해 구성한 육군 예하의 특수부대였다. 실미도 684 주석궁 폭파부대도 같은 시기에 만들었지만 공군 예하로 관리됐다. 낮에 자고 주로 밤에 훈련하는 지옥같은 일정속에 52명의 동기생들은 인간병기로 만들어졌다.

“대북 침투공작도 해보고 국내 공작도 해봤지만 사실상 지옥같은 훈련이 더 힘들었다. 훈련중에 자살한 사람도 있고 탈영을 시도하다 붙잡혀서 한겨울에 대원들의 싸리가지로 맞아 죽어간 동료도 있었다. 우리 동기생 중에 20여명은 안가로 보내져서 공작안내조로 빠졌고 각자 팀별로 작전을 하다보니 정확하게 몇 명이 생존해서 전역했는지 알 수가 없다” 국방부는 한국전쟁 이후 북파공작원 사망자를 7800여명으로 추산했고 이는 월남전 희생자 5600명보다 많은 수치다.

부산 다대포 사건, 무장간첩 2명 생포

대원들은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돼 외출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다만 가족들과 서신교환만 가능했다. 물론 사전 보안검색을 통한 편지였고 그나마 주문진 모부대 주소를 통해 전달됐다. 대원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사실상 민간인 신분이었고 실제로 부상 등으로 조기전역한 대원 가운데는 집에서 징집영장을 받고 정식입대한 경우도 있었다. 설악개발단은 한해 2차례 40~50명씩 대원들을 입소시켰고 150여명의 부대원이 훈련하며 작전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보안서약’에 세뇌된 탓인지 이지부장은 북파공작 보다는 국내공작의 사례 한가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83년 부산 다대포 무장간첩 생포작전이 바로 우리가 성공시킨 것이었다. 남파정보를 미리 알고 매복했다가 육지로 상륙한 간첩 2명을 맨손으로 생포한 것이다. 애초부터 그들을 생포하기 위해 우리들에게 칼한자루 주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 뒤에는 공수부대가 빙둘러 진을 치고 있었는데, 만약 우리가 생포작전에 실패했다면…, 아마도 간첩들과 함께 사살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다행히 이지부장은 입대 3년만인 85년 10월 ‘산 목숨’으로 전역하게 됐다. “그때가 새벽 3시쯤 됐나, 자고 있는데 깨우길래, 조용히 따라나가 보안서약하구, 돈 200만원 받아들구 전역했다. 사전에 동료들과 전역파티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종이 한장도 들고 나올 수가 없어서 대원들 주소도 기억하지 못한채 나왔다”

정부 사회 무관심, 가스통 시위불러

전역직후 어머니의 부재와 사회적응의 어려움 때문에 고민하던 이지부장은 대전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며 자리를 잡았다. 대전시내에서 우연히 설악동지회 대원이었던 김종명씨(41 충남북대전지부 차기회장)를 만났고 이렇게 모인 6명이 지난 96년 친목단체로 설악동지회를 구성했다. 현재는 60~70명의 회원이 격월로 만남을 갖고 있으며 지역 방범활동, 자연보호캠페인 등 봉사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0년 이후에는 전국 조직화를 통해 북파공작원 특별법 제정에 초점을 맞춰 활동해왔다.

“재작년 서울도심 가스통 시위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민정부이후 억울한 사연들이 다 밝혀지는데 유독 우리 북파공작원 출신자들의 목소리는 언론에서도 다뤄주질 않았다. 우리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입소 당시 약속했던 최소한의 보상과 명예회복을 시켜준다면 언제든지 충성을 다 할 것이다”

이지부장도 서울 가스통 시위의 주동자로 몰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시위사건이 사회이슈가 되자 가족들에게 자신의 특수부대 이력을 처음으로 밝힌 회원들이 많았다고. 현재 북파공작 특수부대원들은 정식계약을 통해 입소하고 있으며 전역후 정착금도 1억원대에 달한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95년 이전까지 인간의 권리와 존엄이 무시된채 국가권력에 의해 조련된 북파공작원들에 대해서는 겨우 특별법 제정의 첫 걸음을 뗀 셈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